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대구대교구 김영환 몬시뇰 (13) 대건신학대학

입력일 2003-09-21 수정일 2003-09-21 발행일 2003-09-21 제 2365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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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이고 성실히 최선을 다하는 삶” 강조
탈락자 없이 모두 사제되길 기도
서울대신학교는 그 당시 성소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성소자들을 모두 한 곳에 수용하기에는 너무 협소하였다. 주교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교황대사 람베르띠니 대주교님께서 그때 광주대교구 현 대주교님께 신학교를 하나 더 짓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내어드렸다고 한다.

광주가톨릭대학(당시 대건신학대학)은 당시 영호남 지역의 사제양성을 위해서 즉, 대구, 부산, 마산, 안동, 광주, 전주, 제주, 청주 등의 교구들을 포괄하게 되었고, 서울대신학교는 서울, 인천, 수원, 대전, 원주, 춘천 등의 교구들을 포괄하게 되었다.

광주신학교는 애초에 교수진을 예수회에 맡겼었으나,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교수가 없어 지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한국 신부를 학장으로 하고, 몇몇 한국 신부들을 같이 교수로 임명하였다.

운영하는 도중, 교수단과 주교단 사이에 호흡이 맞지 않아, 교수단이 일단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주교단은 새 교수단을 각 교구에서 차출하여 구성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본당을 떠나야 할 시기에 새 교수단의 일원으로 나를 포함시키기로 했던 것 같다.

당시 광주시는 인구가 60만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시골티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현재는 대도시의 면목을 갖추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교학처장으로 임명되고부터 학장을 역임할 때까지 많은 신부를 배출하였다. 우리에게 직접 교육받은 제자들 중에 벌써 4명의 주교님이 성성되었다. 장인남 대주교(주 방글라데시 대사), 장봉훈 주교(청주교구장), 권혁주 주교(안동교구장), 광주대교구 김희중 보좌주교님이시다.

1975년 대건신학대학 제7회 졸업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 왼쪽 옆은 당시 이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와 그 옆은 정하권 몬시뇰.
그 당시 광주가톨릭대학 교사는 쌍촌동에 있었고, 부지 2만여 평으로 교지로써는 넉넉하였으나 건물이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새로 입학한 신학생들은 방을 찾기가 어려웠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도둑이 들어와서는 출구를 못 찾고 「사람살려」라고 소리쳐서 붙잡힌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주 근처, 목가적인 환경에 모누멘탈한 건물로 새로 지어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성소자도 줄고 있다. 또한 타교구에 신학교가 여럿 생겼기 때문에 자연히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는 성소자 수가 줄었다.

예를 들면,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부산가톨릭대학교가 생겨서 마산교구 성소자들은 부산가톨릭대학교로 가고 청주교구의 성소자들은 대전가톨릭대학교로, 안동교구 성소자들은 대구가톨릭대학교로 가게 되었다.

광주신학교로 가라는 명을 받고 나는 행복했었다. 왜냐하면 항상 신학교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 내 꿈이었기 때문에…. 늙어서 강의를 못하게 되면 고해성사만이라도 주면서 신학교에서 일생을 바치고 싶었다. 신학교에 있는 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기쁜 일이 더 많았다. 사람들이 그 때를 회상하면서 어려웠던 점을 이야기하라면,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이 한 사람도 탈락됨이 없이 전부 사제의 길로 가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바랐다고 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라면 스스로 학교를 물러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학칙을 어겨서 하는 수 없이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던 학생들도 있었다.

학장이 되고부터 학생들에게 가장 강하게 이야기한 것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율적인(auto formatio) 생활을 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매사에 성실하라는 것이었다. 신부가 되면 지도자로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때가 많다. 그때 자율적인 생활이 아니고 타율적인 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스스로를 규율짓는 삶을 살으라는 것이었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역량을 다 발휘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으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가 학장으로 있을 때 학교를 그만 둔 학생들과 신부가 되기 전에 과연 저 사람이 옳은 사제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 신부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은총을 빈다.

학장으로 있을 당시, 1980년 5.18 광주사태를 겪었다. 처음부터 보았기 때문에 세상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도 보았다. 5.18 사태가 수습된 다음, 시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을 밝힐 필요도 없고, 밝히고 싶지도 않다. 때로는 진실이 아니라고 다 밝혀서도 안된다.

1986년 12월 7일, 동계 방학 전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눕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