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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1) 김대건 신부의 후손 ‘천주교 성인공파’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3-03-30 수정일 2003-03-30 발행일 2003-03-30 제 2341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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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신앙의 맥을  찾아 나섭니다
숨은 봉사와 희생의 삶
순교자 12명이나 배출
지난해 9월 15일 김해김씨 성인공파가 창립총회를 갖고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교회는 수많은 선조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얼룩진 교회입니다.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 성장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본지는 창간 76주년을 맞아 「신앙의 명가를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조선말 교회가 들어설 당시부터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와 교회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선조 신앙인들의 후손을 찾아, 그들의 삶과 신앙생활을 소개합니다. 신앙의 맥을 잇고자 누구보다도 충실한 신앙적 가계를 형성하고 있는 후손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2002년 9월.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인 충청도 솔뫼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김대건 신부를 배출한 천주교 성인공파(聖人公派)가 창립총회를 갖고 천주교 집안으로는 최초로 독립된 분파를 만든 것. 이 자리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며 성인공파의 파조인 김진후(비오, 1735∼1814) 순교자의 8∼11대 후손이 한 자리에 모여 선조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11대에 이르는 모든 자손이 신자일 정도로 굳건히 신앙생활을 해 온 후손들은 마침내 그 뿌리를 찾아 천주교 신앙으로 뭉친 최초의 독립 분파를 만들어냈다.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 마백락씨는 『성인공파의 후손들은 특별히 교회와 사회 내에서 주목받는 인사는 없음에도 200여 년 가까이 신앙을 이어오며 교회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됐다』면서 『드러내지 않는 봉사와 희생의 삶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신앙을 그대로 전해 받은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한국 최초의 신부를 배출해 낸 가문으로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한 획을 그은 천주교 성인공파의 후손들이 살아온 길은 과연 어떠했을까?

“밥은 굶지 않는다”

성인공파의 종가 전북 부안군 하서면 등룡리를 찾아 나선 길. 파조 김진후의 10대손 동섭(바스톨)씨가 자신의 조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동섭씨는 조부 병태(8대손)씨가 항상 무엇이든 남에게 내어주기 좋아했고 그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적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또 당시 집안이 갖고 있던 땅 5천여 평을 초등학교 건립을 위해 희사하기도 하는 등 주민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동섭씨는 『조부는 「김대건 신부(당시 복자)의 후손인 우리 집안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절대 굶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그 은총을 항상 생각하며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귀에 박히도록 자신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등룡리에 처음 자리를 잡은 6대 양배와 종기(7대), 용태(8대)씨도 마찬가지. 담배농사로 기반을 잡은 양배씨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등룡리 일대를 매입하고 교우촌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또 1918년 2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1926년에는 대구교구 이기수 몬시뇰을 초대신부로 모셔오는 역할을 한다. 양배씨의 둘째아들 종기씨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역에 간이학교를 설립했다. 또 2400여 평의 논과 5천여 평의 산을 공소에 기증했다.

현재 전주에 살고 있는 용태씨는 부안본당의 산 역사다. 1951년부터 27년간 본당 사목회장을 지내며 지역 교세 확장에 노력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마을청년들과 함께 공소를 지키던 중 종가 본채가 불에 타는 고비도 겪었다. 이 당시 용태씨와 함께 교우촌을 지키던 동료 중 네 명이 순교하기도 했다.

1846년 일어난 병오박해를 피해 변산반도를 거쳐 이곳에 자리잡은 후손들은 맨손으로 불모지를 개척하고 그 곳에 교회를 세워 순교자들의 피를 헛되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모습을 불과 100여년 만에 재현해 낸 것이다.

“묵주 놓지 않고 살아”

「등룡 2마을」이라고 쓰여진 표지석을 지나 마을에 접어들자 맨 먼저 등룡리 공소가 눈에 들어온다. 30여 가구 10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중심. 바로 성인공파 후손들의 피와 땀이 어우러진 신앙의 모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삼종기도였습니다. 시계가 없던 시절 하루 세 번 어김없이 종이 울리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공소에 모여 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기도 바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어르신에게 꾸지람을 받을 정도로 기도의 의무를 지키는 데 철저했지요』

성당과 담을 함께 하고 있는 성인공파의 종갓집에서 만난 파조 김진후의 9대 손인 겸준(요한.74)씨가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마을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중 2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삼종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친 뒤 성서 봉독을 하고 일터로 나간다. 저녁에는 다시 공소에 모여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9일기도를 바쳤다. 이 뿐 아니다. 각 가정에서는 아침식사 전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성당이 있는 전주까지 신부님을 찾아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대부분의 후손들은 세례를 받은 기억조차 없지만 부모로부터 세례 받은 날짜를 받아 자신의 수첩에 적어놓았다.

8대손 용태씨는 자신의 빛바랜 수첩에 적힌 세례일자를 보여주며 『순교자 집안의 후손으로 다시 태어난 날로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중히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은 비록 노인만 남은 마을. 하지만 요즘도 공소예절 때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모여 김대건 신부의 유해(척추 뼈)를 모시고 함께 기도를 바친다. 신앙생활을 이끌어 줄 성직자와 수도자도 상주하지 않는 작은 공소지만 이들은 순교자들의 후손임을 가슴에 새기며 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겸준씨의 부인으로 이곳에 시집 온 뒤 신앙을 갖게된 김정인(데레사.67)씨. 김씨는 천주교 집안으로 시집온 것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의 친정 집 식구 모두를 천주교로 개종시킨 장본인이다.

김씨는 『시아버님은 임종 전날까지도 가족과 함께 손을 잡고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자신들의 기도생활을 회고하며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시고 「신부님, 오늘도 신부님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바칩니다」라며 묵주기도를 봉헌할 때가 시집살이에서 가장 행복할 때』라고 말한다.

열매도 풍성

불과 200여 년 가까운 짧은 역사이지만 성인공파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순교자 12명을 배출했다. 이중 김대건 신부와 김제신 김제준은 103위 성인에, 김진후와 김종한은 주교회의 시복시성 특별위원회가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로 확정한 순교자 124명에 포함되어 있다. 이밖에도 순교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증거자도 10여 명에 달한다.

이들 순교자들의 값진 삶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등룡리에 자리한 「부안 집안」이 이곳 교세확장을 위해 100여 년 가까이 노력한 것을 필두로 「대전/논산 집안」 「익산 집안」 「정읍 집안」 후손들이 이룩한 신앙의 꽃은 풍성하다.

가문이 배출한 성직자만도 전주교구 사목국장 김영수 신부, 대전교구 광천본당 김선태 신부, 대전교구 신방동본당 김용태 신부와 수도자 5명이다.

김대건 신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이들 후손들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살다보니 친척끼리의 왕래도 없었고 나중에는 서로 남남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을 신앙의 힘으로 버티어내며 이들은 비로소 200년이 지난 지금 성인공파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부를 배출해 낸 신앙명가 성인공파는 이제 최초의 천주교 독립분파로 거듭나며 한국교회의 진정한 초석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발돋움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