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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기획 /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낙태 시술 거부 차희제 원장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3-02-09 수정일 2003-02-09 발행일 2003-02-09 제 233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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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하러 온 산모들에게 생명의 소중함 일깨우며 출산 권유
“한 생명 구하는 보람으로 삽니다”
차희제 원장은 『교회가 저와 같은 뜻을 가진 의사들을 모아 낙태를 거부하며 올바른 생명탄생의 순간을 지켜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늘 한가하니 언제든지 오셔도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거의 손님이 없으니까요』

운영이 안돼 문을 닫는 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전화를 통해 직접 이런 말을 들으니 의아한 생각부터 들었다. 신도시 분당에 그것도 100여평 가까운 큰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전문의에게서 나올 말은 아닌 듯 했다.

단지 낙태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병원 꾸리기가 힘든 것일까?

수입없어 문닫을 판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미래축복산부인과 원장 차희제(토마스.48.수원교구 금곡동본당)씨는 낙태수술을 거부하는 의사로 지역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꽤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 99년 개업한 차원장은 이때부터 줄곧 낙태하러 온 산모들에게 낙태의 실상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주고 생명의 소중함을 설명하며 출산을 권유해 왔다. 또 병원 안에 기도실을 꾸며 매주 한번씩 생명 수호를 위한 기도모임을 갖고 낙태로 희생되는 태아를 위해 기도를 바치고 있다.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이 낙태를 하러 오면 나중에 분만비를 받지 않겠다고 설득, 출산을 권유했다. 차원장의 간곡한 권유에 공감하는 이들은 대부분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의 산모들은 낙태를 하지 않는다는 말에 황당해 하며 병원 문을 나섰다. 하루만 다시 생각해 보라며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다음 날 아침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선생님, 좋은 일 하시는 건 알지만 저희는 안되겠어요. 죄송해요』라는 내용이었다.

「십중팔구 다른 병원을 찾을 이들, 또 한 생명이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버림받는구나…」

차원장은 그렇게 병원을 나서는 이들을 볼 때마다 책상에 놓여 있는 성수를 뿌리며 「태아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

『가톨릭 신자들이 오히려 낙태에 더 무감각합니다. 같은 신자 입장에서 사정을 하고 설명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요』

차원장의 설득에 오히려 타종교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며 마음을 돌리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오히려 화를 낸다고 한다. 차원장은 이것이 고해성사 때문이라고 여긴다. 실제로 낙태를 원하는 몇몇 자매들을 면담하고 설득했지만 대부분 고해성사로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낙태를 한다고 한다. 차원장은 그런 그들이 성당에서 영성체를 마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차원장이 산부인과를 택한 것은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한다는 보람 때문이었다. 가장 편안한 보금자리,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그 자리에서 아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온몸이 처참히 찢겨져 나가며 죽는 현실을 자신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막아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직무 대신, 차원장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99년 개원이후 지금까지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낙태를 하지 않고 오로지 일반진료와 분만을 하는 차원장의 경우는 사실 산부인과 의사로서는 모험이나 다름없다. 분만수가도 적을 뿐 아니라 분만사고의 위험이 있어 낙태만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도 있다. 분만환자를 받게 되면 입원실, 주방도 마련해야 하고 여러 부대비용이 만만치 않다.

「눈 딱 감고 낙태환자를 받으면 적자를 조금이나마 면할 수 있을 텐데」라는 유혹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차원장을 다독거리며 도와준 것은 차원장의 부인 조마리아씨와 가족들이었다.

그간 모아놓았던 통장을 하나 둘 처분해야 했다.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승용차를 처분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은 차원장을 위해 기도를 바치며 힘을 실어주었다. 조마리아씨는 본당신자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꾸려 매주 한번씩 병원 기도실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있다.

낙태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줄긴 했지만 여전히 일주일에 대여섯명 정도가 낙태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는다. 낙태시술은 하지 않는다고 3년이 넘게 홍보를 했는데도 이렇게 찾아오는 것을 보면 다른 병원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차원장의 설명이다.

병원 안에 마련된 기도실. 여기서 매주 생명수호 기도 모임을 갖고 있다.
차원장은 근 3개월간 낙태 상담을 온 산모 중 한 명도 설득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자신의 권유에 마음을 고쳐 출산하는 산모를 보며 보람을 느끼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없어졌다. 그나마 산모들의 낙태를 막아볼 기회조차도 점점 줄고 있다. 노레보 등 사후피임약이 시중에 유통되면서 낙태환자들도 점차 숫자가 줄고 있다는 것.

하지만 차원장은 산부인과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낙태거부를 비롯한 생명운동은 꾸준히 해나가겠다고 다짐한다.

『낙태 거부하는 의사라고 이렇게 많이 알려지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제가 만약 제풀에 지쳐 그만둔다면 오히려 안 좋은 선례가 아니겠어요. 오히려 교회가 저와 같은 뜻을 가진 의사들을 모아 낙태를 거부하며 올바른 생명탄생의 순간을 지켜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이 해 주실 것이라 믿으며 기도실을 찾는 차원장. 현재 차원장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여주듯 병원 구석에 자리한 기도실이 왠지 썰렁해 보인다. 하지만 기도실 옆 입원실에서 바로 어제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환한 웃음을 짓는 차원장의 모습에서 오늘도 또 하나의 생명을 살려냈다는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