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새해기획 /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큰집설렁탕집 박태운 씨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3-01-19 수정일 2003-01-19 발행일 2003-01-19 제 233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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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증서 1장에 설렁탕 두그릇’ ‘백혈병 어린이에게 희망을’
 “사랑 모아 나누니 살맛나는 세상”
「사랑의 헌혈증서, 백혈병어린이에게 희망을. 헌혈증서 1매↔설렁탕 두 그릇」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 2동 도로변에 자리잡은 큰집돌솥설렁탕전문점.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플래카드가 이색적이다. 카운터 한 편에는 헌혈증 모금함도 보인다. 모금함에는 손님들이 식대 대신 놓고 간 헌혈증과 사연을 알고 헌혈증 대신 기부한 1만원짜리가 쌓여 있다.

식대 대신 헌혈증을 내놓는 손님과 그 헌혈증과 계산서를 함께 받아 모금함에 집어넣는 이 집 사장 박태운씨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큰집설렁탕집 사장인 박태운(토마스.47.서울대교구 호원동본당)씨가 헌혈증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00년 7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층 짜리 대형 설렁탕집을 차린 뒤 불과 두 달이 지난 뒤였다.

무엇을 할수 있을까?

『저의 영명축일에 감사미사를 봉헌하던 중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더군요. 아 나도 이제 좀 여유가 생겼는데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오랜 기간 정기적으로 지역사회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독거노인 초대 식사대접, 기부금 헌액 등 많은 일들이 생각났지만 대부분 일회적이어서 박씨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문득 치료를 할 때마다 헌혈증이 수십 장씩 필요한데 그 비용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백혈병 환자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씨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플래카드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바로 「헌혈증 1장에 설렁탕 두 그릇」이 시작됐다.

「과연 헌혈증을 모을 수 있을까? 괜한 고생하는 건 아닌지」하는 생각도 많았다. 식구들도 박씨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장사 시작하며 진 빚도 갚기 전에 이런 일을 벌인다는게 내심 언짢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헌혈증을 챙겨 설렁탕 값보다 더 비싼 값에 팔려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서 박씨의 뜻에 동참하는 손님들이 늘어갔다. 여기저기 소문이 퍼지면서 지갑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헌혈증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2년 반동안 모은 헌혈증은 총 5천여장. 이중 4천 여장은 백혈병을 앓고 있는 10여명의 환자들에게 이미 전해졌고 최근에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도 헌혈증을 보내고 있다. 박씨는 지역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안타까운 사연이나 도움호소 기사를 접하면 바로 환자에게 연락, 헌혈증을 전달해 주고 있다. 또 소문을 듣고 식당을 직접 찾은 환자 가족에게는 즉석에서 헌혈증을 주고 있다.

헌혈증을 통해 자신의 피를 나눈다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사랑 나눔일지 모르겠다는 박태운 사장이 손님에게 받은 헌혈증서를 함에 넣고 있다.

다른 체인점도 동참

하지만 도움을 준 환자나 환자의 가족을 만나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

『전 이제까지 50여회 정도 헌혈했을 뿐입니다. 제가 헌혈해서 모은 것도 아닌데 부끄럽게 환자들을 어떻게 보겠어요. 설렁탕 한 그릇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좋은 관습을 따라한 거에요. 헌혈증은 우리 손님들이 모아 주신 것이죠. 전 그저 헌혈증을 모으는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헌혈증이 쓰여진 곳을 손님들에게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 박씨는 식당 커피 자판기에 「헌혈증서 지원내역」을 정기적으로 게시하고 있다.

박씨로부터 총 32회에 걸쳐 1600여장의 헌혈증을 전달받은 9살짜리 김 젬마 어린이는 백혈병 증세가 호전됐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하혈이 심한 직원을 위해 한 군청에서 급히 헌혈증을 모았지만 전 직원이 가지고 있던 헌혈증은 불과 10여장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들려 선뜻 100여장의 헌혈증을 보내기도 했다. 도움을 받은 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박씨는 이런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헌혈증 모으기의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헌혈증 모으기 소식을 들은 구리, 대전, 수원, 안산, 부평, 화정, 명일동의 큰집설렁탕 체인점에서도 2000년 겨울부터 속속 헌혈증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 체인점에서는 각 지역의 어려운 환자들에게 헌혈증을 전달하고 있으며 헌혈증이 급히 필요한 체인점에 서로 전달하고 있다.

이웃돕기 부전자전

『부모님이 없으셨다면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요즘은 아버님도 이 일에 적극 동참해 주시는 숨은 조력자입니다』

박씨의 아버지는 현재 빈첸시오 서울이사회 경기북부지구 이사회장인 박상범(베드로)씨. 두 다리에 장애가 있어 거동이 불편한 중에도 박상범씨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빈첸시오 활동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도 4대 독자인 아들에게 용돈 한번 제대로 주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박씨는 봉사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대형 식당을 시작하느라 진 빚을 다 갚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혈증 모으기를 시작한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이다.

박씨는 헌혈증을 모으는 일 외에도 지역사회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매달 한번씩 지역내 무의탁 노인들의 생신잔치를 식당에서 열고 있으며,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의정부지역 핸드볼 선수들을 틈날 때마다 초청, 식사를 함께 하며 어린 선수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다.

『헌혈증을 통해 자신의 피를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사랑 나눔일지 모르겠습니다. 헌혈증 모으기는 음식점을 그만 둘 때까지 계속 할 겁니다. 이 일을 하면서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한 박태운 사장의 뒤로 헌혈증서를 모으는 플래카드가 눈에 뜨인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