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새해기획 /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남대문시장 상인 전애순 씨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3-01-05 수정일 2003-01-05 발행일 2003-01-05 제 233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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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재물 잃는 게 속편하죠”
밤낮 뒤바뀐 시장통 삶 25년
순간 순간 지칠법도 하건만
한결같은 친절로 ‘희망’은 덤
전애순씨는 『좋은 사람 만났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교의 전부』라고 말한다.
세상이 단꿈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한밤, 서울 남대문시장은 새로운 활기로 다시 한번 깨어나기 시작한다. 자정을 넘기면 시장은 이내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풀어놓는 숱한 사연들로 넘쳐난다.

하루 평균 35∼40만명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한 곳에서 전애순(안젤라.56.서울 신대방동본당)씨가 삶을 꾸려온 옷가게도 벌써 수 십년째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희망과 함께 하며 생동감을 만들어내는데 한 몫을 해오고 있다.

서울 중구 남창동 31번지, 1만개가 넘는 점포가 몇 호 몇 호라는 이름으로 즐비한 틈에 「삼진사」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세우며 전씨의 가게가 들어서 있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11시, 전씨의 하루도 늘 이 곳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인들을 대상으로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금방 새벽이 가고 아침이 찾아온다. 한겨울에도 후끈하기만 한 시장의 열기가 가라앉는 그 시간이면 피곤한 몸은 스스로 잠시나마 엉덩이를 붙일만한 자리를 찾게 만든다. 잠시 쉴만한 곳이래야 1.5평 남짓한 가게 한 구석에 마련된 의자가 고작이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존 틈에 들리는 어렴풋한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선다.

지난 78년 막 돌을 넘긴 딸을 안고 부산에서 올라와 처음 시작한 일이 아동복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이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올해로 꼭 25년 동안 전씨와 삶을 같이 해온 소중한 일터인 셈이다. 명절이나 새 학기 때면 대여섯시간 동안 한번도 자리에 앉아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전화 받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지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비슷비슷한 가게들 가운데서 전씨의 가게라고 해서 두드러진 점은 없으나 눈에 드러나지 않는 특별한 면이 있다.

『좋은 사람 만났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어요. 그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선교의 전부죠』

낮과 밤이 바뀌는 생활이 상상외로 고달파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흐트러질만도 하지만 전씨의 태도는 「한결같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다보면 순간순간 욱하는 마음이 치밀 때도 없지 않지만 한마디 말에라도 최대한 사랑을 담아보내자는 게 짧지 않은 시장통의 삶을 통해 터득한 그의 철학이자 희망을 나눠온 방법이다.

공장 겸 집이 있는 상도동에서 매일 밤과 아침 한강을 넘어 오가는 그는 순간순간 화살기도만은 잊지 않는다. 누구 못지 않은 건강에다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여력을 주신 하느님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다.

『사람을 잃기 보다 재물을 좀 잃는 게 속 편한 것 같다』는 그는 어쩌면 장사를 하기에는 모자라는 상인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껏 자신을 붙들어준 힘인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을 대해왔기에 몇 마디만 나눠봐도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는 그는 알고도 손해를 보기 일쑤다.

『제가 의도하지 못한 가운데 상처를 준 일도 많았을 텐데, 저로 인해 상처 입은 이들에게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해요』

이런 가운데서도 전씨는 꾸준히 나눔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이런 나눔은 옷가게를 연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활이 기도가 되도록」이라는 좌우명대로 살고자 하다 보니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적잖게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것이다. 밤일을 꼬박 하고 나서 피곤한 것도 잊고 교도소 봉사를 비롯해 사회복지시설 봉사 등 가능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나섰다. 교도소를 오가며 수 백명의 수인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 새 사형폐지론자가 되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을 만나며 가난함을 돌아볼 줄 알게 됐다는 그는 교회가 단순히 기도하는 법만 배우는 곳이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됐다고 쑥스럽게 털어놓는다.

『밤일을 마치고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다 보면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좋은 하루를 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그 좋은 하루를 자신만을 위해 쓰기는 아까웠지요』

수 십년간 옷에서 나는 먼지를 마시다 보니 목소리마저 변해버렸다는 그는 바자를 여는 성당이나 사회복지시설에서 수시로 물품 기증을 요청해와도 싫은 내색 없이 옷가지를 챙겨 보낸다. 오히려 그들을 찾아가 하루종일 함께 물품을 팔아 수익금을 전하기도 한다. 장사를 하며 겪은 어려움이 오히려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배울 수 있는 삶의 현장이 그는 싫증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시장에만 나서면 자신도 모르게 눈이 반짝이고 만다는 그는 천상 장사꾼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며 웃음을 짓는다.

하느님이 아담을 찾으시듯 「어디 있느냐」는 목소리가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만 같다는 전씨, 손님이나 이웃을 대하면서 그들 중에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늘 돌아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는 인간적인 땀 냄새와 신앙의 열정이 묻어났다.

※연락처=(02)752-1512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