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33) 이순이 누갈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01-11-11 수정일 2001-11-11 발행일 2001-11-11 제 227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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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첫날밤‘동정부부’서원
4년 간 오누이처럼 살다 순교
옥중 죽음 앞두고서도 남편과 가족들만 걱정
사를르 달레는 그의 불후의 명작인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순이(누갈다, 1781~1801년)와 유중철 요한 동정부부 순교자의 옥중 서간을 소개하면서 『일찍이 신앙과 순결과 순박과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사랑이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한 적은 없다』고 감탄하였다.

누갈다는 「천주실의」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던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8대 손인 이윤하를 아버지로, 그리고 한국천주교회 건설의 3대 공로자 중에 한 분이신 권일신의 누이인 권씨를 어머니로 하여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성장했다. 그녀는 14살이 되던 해에 주문모 신부를 맞아 첫영성체를 하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3일간 금식과 철야기도로 준비하여 성체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주님과 일치를 이룬 은혜를 감사하며 그 감격을 영원토록 간직하기 위해 순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풍습 때문에 양가의 규수가 독신으로 순결을 지키기는 불가능하였다. 어머니 권씨는 딸의 마음을 헤아리며 근심하다가 마침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거룩한 삶을 원하던 유중철과 동정부부로 결혼하게 되었다.

1797년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의 장남인 유중철과 부부가 된 누갈다는 이듬해 9월에 전주의 시가로 가서 첫날밤에 부부가 함께 동정서원을 하고 그 약속을 흠없이 지키며, 마치 성요셉과 성모마리아 같은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남편은 아내를 늘 「누이」라고 불렀다. 누갈다는 시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너무도 겸손하고 감탄할 만큼 온순하며 그 많은 식구들과 조그마한 불화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덕행이 향기처럼 온 집안에 가득 찼다고들 했다. 그런데 그들의 아름답고 고결한 동정부부 생활은 4년 만에 순교의 거룩한 피로 성스럽게 끝맺는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 박해가 시작되자 그 해 봄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체포당하고 9월에는 누갈다와 나머지 집안 식구들도 함께 체포당했다. 친정의 오빠마저 서울에서 체포당한 가운데 그녀는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와 친정 올케언니에게 편지를 남겼다. 이 옥중서간에서 그녀는 어머니께 처음으로 자신의 동정부부 생활을 고백하였다. 『어머님을 영원히 떠나 다시는 어머니께 효성을 다할 기회를 잃게 되는 날을 앞두고, 어찌 일체의 인정을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 이가롤로가 서울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큰 은총이며 얼마나 큰 보호입니까? 저는 어머님의 행복을 찬양합니다. 4년 전에 어머님 앞을 떠나온 저는 제 마음의 모든 감정을 알려드릴 길이 없어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어머님께 주셨다가 도로 거두시는데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로 조절되는 것이니 그것을 너무 슬퍼하는 것은 교우로서는 웃음을 사 마땅한 나약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시집에 이르렀을 때에 제 모든 불안의 대상이고, 제 모든 날의 걱정이던 것을 쉽게 얻었습니다. 남편과 아홉시에 함께 있게 되었는데 열시에는 우리 둘이서 동정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고, 우리는 4년 동안 남매와 같이 지냈습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친정 어머니께 보낸 이 글을 보며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누갈다는 친정 올케언니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붓을 드니 할 말이 없군요. 불쌍한 우리 오빠가 돌아가셨나요? 살아 계신가요? …어머님과 새언니가 어떻게 그것을 견딜 수 있겠어요.… 그것을 생각하면 오직 불안과 걱정 뿐 어떤 말로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가 돌아가셨다면 그 초상범절을 어떻게 지내셨으며, 만일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면 오빠가 그 추운 옥중에서 어떻게 견디겠어요. 오빠가 죽었거나 살았거나 우리 어머님의 간장이 탈 것입니다』

누갈다는 옥중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오직 남편과 가족의 순교만을 빌며 그들이 용감히 하느님을 증거하기만을 빌었다. 특히 남편이 장한 순교자가 되기를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순교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 왔어요.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제 모든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그의 모든 처신을 생각하면 뉘우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세속정신을 떨쳐버린 진짜 교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제는 제 애정을 사로잡고 제 머리를 번거롭게 할 수 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머리에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향한 것이고, 제 가슴에 한숨이 한번 나오면 그것은 하늘을 향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동정녀는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는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름다운 동정과 순교의 꽃 중의 꽃으로 순교사에 곱게 피어있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