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30) 김건순의 종형 김백순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01-10-14 수정일 2001-10-14 발행일 2001-10-14 제 227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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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양명 위해 과거 공부하다 진리 깨닫고 교리연구에 몰두
부인 친척들 비난에 “하느님과 의절 못해”
지난호에서 보았듯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세력인 노론 대가에 속한 김건순이 이렇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그의 마음이 바르다는 말을 듣고 주문모 신부는 편지를 보내 복음의 참된 정신을 알렸다. 그리고 신기한 물건이나 마술적 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였다. 김건순은 감격하여 그 동안의 잘못 몰두했던 술법에 관한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구원의 바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께 세례성사를 받고 요사팟이란 세례명으로 입교할 때, 그의 친구들도 그를 따라 입교했다. 그들 중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은 뒷날 여주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했다.

김건순 요사팟은 영세 입교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굳건하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겸손은 그의 공로와 그 크기가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던 그의 가문은 그를 크게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해 동안 그는 매우 괴로운 가정의 박해를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배교한다는 지극히 형식적인 말 한마디를 얻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김건순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본분을 충실히 지켜나갔다. 그는 정약용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배교문에 서명하여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괴로워했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1801년 마침내 박해가 일어나고 김건순도 체포당했다. 권력 있는 그의 집안은 온갖 조치를 취했다. 심문이 시작되고 주문모 신부와도 대질심문을 받았다. 관변측 기록은 이 때, 김건순이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배교하는 언사로 시종일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사형을 집행 당했고, 그의 종가에서는 그의 양자입양마저 파기하여 없었던 것으로 했다. 그가 관변측 기록대로 배교했다면 그 권문세가에서 양자를 어찌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에 대한 황사영 백서의 기록을 주목한다. 백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처형당할 때 시민들에게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않았소. 오직 하느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것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김백순(?~1801년)은 김건순의 종형이다. 그의 신분과 배경으로 보아 그도 김건순과 같이 분명 정치적으로 가해자의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한시 바삐 공직에 나가 명예를 얻고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김백순은 순전히 입신양명을 위한 방편으로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출세를 위해 학업에 전념하던 그는 성현들의 책을 읽으면서 서로 모순되고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 의심 속에서 참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노자의 글과 그 밖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그 나름대로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설명해 보았다. 그랬는데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듣고서는 『자네 말은 매우 이상한데 자네는 아마도 서학에서 그 모든 것을 따온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친구들의 이 지적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서학에 그런 도리가 이미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서학에는 우리의 지능을 초월하는 원대하고도 비상한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곧 천주교인들을 찾아 만나고 교리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확신을 갖고 교리를 신뢰하며 온 정성을 다해 천주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며 계명을 지켰다.

그는 먼저 어머니를 권면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이것이 참도리이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이 도리를 따라야 하니 나와 같이 하시오』하고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다만 세속적 야망을 버리지 못한 그의 부인은 입신양명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남편을 원망하며 비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숙부가 찾아와서 온갖 방법으로 김백순을 변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김백순의 의연한 모습에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백순은 『나는 숙부와 의절을 하더라도 나의 하느님과는 의절치 못하겠습니다』라고 조용히 답했다. 이 때부터 그는 친구들과 친척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안 뒤로는 내 마음이 결코 흔들림이 없어 마치 산과 같다』고만 하였다.

1801년 봄에 김백순은 한 배교자의 밀고로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고, 3월 29일 서른 두 살의 약관으로 순교하였다. 그가 옥중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는 말은 없다. 그는 혈세(血洗)의 증거자이며 파당을 초월한 하느님 진리의 수호자이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