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책에 있는 이야기 말고 삶의 이야기 해주세요 / 이상협 신부

이승훈
입력일 2024-04-01 수정일 2024-04-01 발행일 2024-04-07 제 338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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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또는 원고를 부탁받을 때에 이런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9년여의 아프리카 선교 생활, 그리고 현재 이주민 사목을 하면서 겪은 감동적이거나 보람 있었던 사건들 등. 신자분들은 이처럼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딱딱한 신앙지식에 관한 강의 보다는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더 친근하고 재미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요즘은 다큐멘터리, 토크쇼, 유튜브, SNS 등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삶의 이야기만을 선호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져 봅니다.

너무도 많은 정보에 피로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타인의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성보다 감성이 중요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자들이 사제의 지적 수준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요즘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때때로 지식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삶의 경험 나눔도 좋지만, 때로는 책에 있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기도 하지요. 강론에서 어느 교부의 어록에서 인용한 한 구절의 가르침을 듣고 어느 신자분이 오랜 신앙적 고민에 해답을 찾았다면서 감사함을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을 만난 적도 있지요.

제 이야기가 중심일 때는 늘 “과거에 어느 곳에 있을 때에…”처럼 긴 부연 설명으로 시작했다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로 끝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험을 곱씹어볼 지식이 있을 때는 굳이 긴 설명이 없이도 이야기가 단순명료하게 전달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음식을 만드는 재료가 경험이라면 그것을 음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지식일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어느 순간부터 삶에 관한 이야기보다 지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삶 안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더욱 신학에 대한 갈증이 더 커져 감을 느낍니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신학적 물음과 고민으로 다가오고 해답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내가 정말 무지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9년여의 남수단 생활 안에서 그렇게 경험하고도, 지식이 부족해서 정리할 수 없었던 물음들은 결국 기억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생겨난 소중했던 물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고, 사건들만 희미하게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삶의 경험만 이야기할 때에 저는 지식이 부족한 것에 대해 늘 마음 한편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무지하면서 의욕만 있는 사제의 삶은 누군가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반성도 해봅니다.

“틀에 박힌 이야기만 하려고 하지 마시고, 부담 없이 좀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하셔도 됩니다”라는 선의에서 나온 배려의 말을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조금 비틀어 해석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제 삶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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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