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김성우 안토니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3-26 수정일 2019-03-26 발행일 2019-03-31 제 313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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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도 죽어서도 천주교인으로…
은계동·향남·구산본당 주보
‘사학의 괴수’로 지목될 만큼 
박해시기에 왕성한 활동 펼쳐

구산성지 김성우 성인상.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

배교하라는 재판관의 독촉에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이 한 대답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성인은 제1대리구 은계동·향남본당과 성인이 교우촌으로 일군 곳이자 성인의 무덤을 오늘날까지 지켜온 구산본당의 주보성인이다.

1795년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태어난 성인은 구산마을의 경주 김씨 집안의 후예였다. 부유한 양반 집안이었던 성인의 집안은 구산지역의 넓은 농지를 소유한 지주기도 했다.

성인은 성품이 정직하고 아량이 컸다고 전해진다. 학식도 풍부했을 뿐 아니라 인품도 온후해 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성인은 양반의 자제였던 만큼 어려서부터 철저한 유교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를 접한 성인은 동생 만집(萬集)·문집(文集)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성인은 가족과 친척에게 교리를 전했고, 나아가 마을 전체를 교우촌으로 변화시키기에 이렀다.

신앙에 대한 열망이 컸던 성인은 1833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자 교리를 배우고 성사생활을 하고자 거처를 서울로 옮겼다. 세례를 받은 성인은 서울 느리골(현 효제동)과 마장안(현 마장동) 등에서 생활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또 자신의 집에 강당을 마련해, 신자들이 교리를 공부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했을 때는 자신의 집에 모방 신부를 모셔와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전해줬다.

이후 성인은 모방 신부에게 구산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됐다. 성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과 능력을 활용해서 신자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교회력을 전파하는 등 전교에 매진했다. 또 회장으로서 임종을 앞둔 이들에게는 대세를 주고, 사제 방문 시에는 사제를 보필하는 역할도 맡았다.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성인은 이미 박해자들에게도 유명했다. ‘사학의 괴수’로 지목된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에 체포돼 한양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성인은 무려 15개월이나 옥중생활을 했다. 당시 조선이 여러 해에 걸친 가뭄으로 사형 집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심문과 형벌이 이어지는 고된 옥중 생활이었지만, 성인은 감옥을 마치 자신의 집인 듯이 행동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함께 갇힌 죄수들에게 선교해 2명을 입교시키기도 했다.

성인은 한결같이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신앙을 증거했다. 마침내 성인은 1841년 4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성인의 유해는 후손들의 의해 다시 구산으로 옮겨졌고, 오늘날까지 구산성지에 성인의 묘소가 보존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