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대구가톨릭대학교 ‘3·1운동과 대구대교구’ 심포지엄

박원희 기자
입력일 2019-03-12 수정일 2019-03-13 발행일 2019-03-17 제 3136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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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이끈 지역 평신도들,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시작
서상돈·주변 신자들 중심으로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확산
1919년 3·1운동 때도 활동 
계산·왜관본당 청년들 등 적극적 항일운동 펼쳐 ‘눈길’

대구가톨릭대학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3월 5일 오후 3시 대구시 중구 남산동 유스티노 교정 대강당에서 ‘3·1운동과 대구대교구’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사진은 영남교회사연구소장 김태형 신부가 ‘성유스티노신학교의 3·1운동’ 주제 발표하고 있는 모습. 이날 심포지엄에는 수도자와 평신도, 신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대구 지역도, 그곳의 가톨릭신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100년, 3·1운동 100주년 심포지엄이 열린 대구 남산동 대구가톨릭대학교(총장 김정우 신부) 유스티노 교정에서는 그때의 함성이 메아리쳐 다시 들리는 듯 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3월 5일 오후 3시 ‘3·1운동과 대구대교구’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영남교회사연구소(소장 김태형 신부)와 한국가톨릭신학학회(학회장 곽종식 신부)가 공동주관했다.

그동안 한국천주교회는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평을 받아왔다. 혹독한 천주교 박해를 경험한 바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신자들의 참여를 막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그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평신도들의 활약상이 언급됐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서상돈(아우구스티노) 회장 등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신앙인들이 재조명됐다. 특히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3·5만세운동과 항일운동 선봉에 섰던 대구대교구 평신도들의 활약상은 더 충분한 연구를 통해 알려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격려사에서 “최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3·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운동과 관련한 한국교회의 소극적인 대응은 마땅히 사과하고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 대주교는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3·5만세운동과 평신도들이 주축이 돼 암암리에 진행된 항일운동은 재조명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대구지역 첫 만세운동

영남교회사연구소장 김태형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회사 교수)는 ‘성유스티노신학교의 3·1운동’ 주제 발표에서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안세화 드망즈 주교의 일기와 교구연보 등에 기록된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역할을 상세히 소개했다.

김 신부는 “드망즈 주교 일기에는 항일 운동과 관련된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갖가지 이유로 앞당겨 방학한 5월 1일 직전까지 신학생들이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뜻을 같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전했다.

또 김 신부는 “대구와 경상북도의 3·1만세운동은 경상남도와 전라도보다 늦은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시작돼 50일에 걸쳐 22개 시군에서 지속됐다고 알려졌지만, 드망즈 주교의 1919년 3월 7일 일기를 보면 3월 5일 저녁 성유스티노신학교 전교생 60명이 신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가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신부는 “교장 샤르즈뵈프 신부가 학생들을 말리느라 애를 먹었고, 신학생들 중에는 성소를 잃은 학생들이 나올 것 같다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며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선교사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성유스티노신학교의 만세운동은 조국과 민중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신학생들의 고귀한 정신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국채보상운동, 3·1만세운동 주춧돌 놓아

이날 심포지엄의 첫 번째 발제에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이경규(안드레아) 명예교수가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의 성격과 3·1운동’을 주제로 발표한 이 교수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주권수호운동으로 평가받는 ‘국채보상운동’이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1907년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외채를 상환하고 주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국채보상운동’이 민족의 애국심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마중물이 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서상돈 회장이 발의한 국채보상운동은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 일본에 빌린 외채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되찾자는 민중운동으로 시작됐다”며 “대구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뻗어나가, 어린 아이부터 걸인, 기생, 인력거꾼 등 나이와 계층을 따지지 않고 참여해 진한 감동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또 이 교수는 “국채보상운동 확산은 서상돈 회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정규옥(바오로) 등 솔선수범한 천주교 신자들의 참여가 있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관서지부장을 자청하는 등 힘을 보탰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또한 진남포 삼화항 폐물폐지부인회에 적극 참여했다고 전했다.

■ 항일운동 이끈 대구대교구 평신도

마지막 세 번째 발제는 영남대학교 사학과 김정숙(소화 데레사) 교수가 맡았다. 김 교수는 ‘대구대교구 평신도의 항일 운동’을 주제로 교구는 물론 지역 발전에 주축이 됐던 여러 평신도들의 활동상을 전했다.

김 교수 또한 이경규 교수가 주제로 삼았던 국채보상운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아울러 지역에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한 서상돈, 김하정, 정준수 등 여러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을 소개했다.

특히 계산본당 청년들과 왜관본당 청년들의 활동상을 면밀하게 전하며,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대중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편 김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사과의 뜻을 밝힌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의 메시지를 언급하며 아쉬우면서도 감사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김 교수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구성된 당시 한국교회 지도층의 입장이 항일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점은 사과하고 반성해야함이 마땅하지만, 한국교회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메시지라 아쉬운 면이 있다”면서 “3·1만세운동의 참가자 수가 일제 추산으로는 106만여 명이지만, 당대 민족주의자 박은식의 집계로는 200만 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3·1만세운동에 천주교 신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연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함께 연구해나가자고 제안했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앞줄 가운데), 총대리 장신호 주교(조 대주교 오른쪽)가 이날 행사를 주관한 영남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신학학회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원희 기자 petersc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