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이끈 지역 평신도들,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시작 서상돈·주변 신자들 중심으로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확산 1919년 3·1운동 때도 활동 계산·왜관본당 청년들 등 적극적 항일운동 펼쳐 ‘눈길’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대구 지역도, 그곳의 가톨릭신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100년, 3·1운동 100주년 심포지엄이 열린 대구 남산동 대구가톨릭대학교(총장 김정우 신부) 유스티노 교정에서는 그때의 함성이 메아리쳐 다시 들리는 듯 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는 3월 5일 오후 3시 ‘3·1운동과 대구대교구’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영남교회사연구소(소장 김태형 신부)와 한국가톨릭신학학회(학회장 곽종식 신부)가 공동주관했다. 그동안 한국천주교회는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평을 받아왔다. 혹독한 천주교 박해를 경험한 바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신자들의 참여를 막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그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평신도들의 활약상이 언급됐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서상돈(아우구스티노) 회장 등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신앙인들이 재조명됐다. 특히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3·5만세운동과 항일운동 선봉에 섰던 대구대교구 평신도들의 활약상은 더 충분한 연구를 통해 알려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격려사에서 “최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3·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운동과 관련한 한국교회의 소극적인 대응은 마땅히 사과하고 반성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 대주교는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의 3·5만세운동과 평신도들이 주축이 돼 암암리에 진행된 항일운동은 재조명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박원희 기자 petersc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