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이사 42,1-4, 6-7) 제2독서(사도 10,34-38 또는 티토 2,11-14; 3,4-7) 복음(루카 3,15-16,21-22)
역효과의 법칙이 있다. 우리는 수면에 떠 있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가라앉는다. 그러나 가라앉으려고 하면 오히려 떠오른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반대의 효과를 만나게 된다. 이것을 역효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결국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우리는 수면에 떠 있을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누군들 물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유영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부단한 발버둥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 혹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스스로 기약(期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라고 불렀다. 나머지는 ‘배워서 알거나’(學而知之者), ‘발버둥을 치고 노력해서 아는 사람’(困而知之者)이다. 그러나 공자는 중요한 것은 나면서부터 알든, 배워서 혹은 억지로 노력해서 알든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안 사람을 넘어 나기 전부터 아신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신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하느님의 일을 자연스럽게 이루는 것이나, 혹은 태어나면서 아는 자(生而知之者)들의 순리에 따른 행동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라기보다 기계에 가깝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린 일화를 보면 예수님의 자연스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나면서부터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움은 노력의 자연스러움이다. 이 자연스러움이란 매시 매초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하느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비움이며 겸손이다. 자기를 비워야 하느님 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력의 자연스러움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하나에 만족하지 않으며 지나간 과거에 우쭐하지 않고 미래를 예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겸손하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치고는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소개할 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이유다. 먼저 ‘길’을 가야 하고 그 와중에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간혹 한 번의 깨달음으로 진리를 알았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치 못한 사람들이다. 개량한복을 입고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때론 머리 깎고 승복 입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를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아니면 끝없이 답을 찾아가는 삶에서 도망친 자들이다. 그들이 진리를 한 번 마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붙잡은 진리는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왕양명이라는 사람은 그런 진리를 ‘광경’이라고 불렀다. 헛된 그림자, 혹은 찰나에 사라지는 풍경일 뿐이라는 의미다. 참다운 진리를 안 사람은 하나의 광경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요”라고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여긴 것은 다시 한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n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중국철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