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신명 4,1-2.6-8 (제2독서) 야고 1,17-18.21ㄴ-22.27 (복음) 마르 7,1-8.14-15.21-23
‘혼자’여서 외로울 때가 있고 ‘함께’여서 고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상처를 덜 받고 덜 주는 상태는 ‘혼자’도 ‘함께’도 아닌, 그냥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가까이에 있기’를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이뤄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며, 늘 ‘가까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입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을 언뜻 보면 ‘율법’과 그에 따른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 주는 ‘가까움’, 그 친밀함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회를 종교적 관점에서 재편성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진정한 기능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친밀함, 그 ‘가까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라고 선언하고, 복음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고 지적합니다. 하느님과의 가까움, 그 친밀함을 드러내고 유지하는 것이 율법의 본질인데, 형식주의적인 실천만 강조되고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 기능과 역할은 무색해지고 맙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살아가는 것과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것…. 율법의 진정한 기능을 통해 알려주시는 이번 주일 본문들의 주제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며 시작된 마르코 복음(1,1)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종결되는 구조로 전개됩니다. 특별히 후반부(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들)를 미리 준비하며 전반부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인데, 예수님 혹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양립되어 소개되는 이 인물들은,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이 율법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만 집중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 역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하면서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 내게서 멀리 떠나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7,1)로 시작된 오늘 본문은 명백히 구별되는 두 그룹의 대조를 통해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이들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관습과 전통 위에 정초된 율법 조항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신분사회 질서와 그 질서를 유지해주는 율법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이에 대한 실천도 철저히 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가 갖고 있던 문제는,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전통과 규칙 준수에 종교의 본질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자의식만을 권위의 기준으로 삼는 종교는, 더 이상 마음에 그 무엇도 성장하거나 자라지 못하게 하고, 그 어떤 사랑에도 무감각해지게 하며,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며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7-8절) 진정한 종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열렬히 동의하며 기쁨으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실천의 대상은 ‘율법과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