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지향은 ‘죄’ 아닌 ‘원리’입니다 나약한 의지 탓하며 스스로 질책은 금물 당연한 원리 받아들여 타인 지향 실현
찬미 예수님.
맑은 오월 성모님의 달이 지나고, 아드님 성심의 달이 시작한 지도 꽤 지났습니다. 신학교의 방학도 열흘이 채 남지 않았지요. 이맘때가 되면 다른 분들은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아 좋겠다고 부러워들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방학이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어요.” 반쯤은 진심을 담아 대답하지요. 학생들보다 오히려 선생이 방학을 더 기다린다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지내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이 자꾸만 많아집니다. 그래도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들이나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신자분들에 비하면 훨씬 편안한 생활이지만, ‘제 코가 석자’라고, 학기말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지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심신의 피로보다도 더 크게 느끼는 것은 바로 함께 지내는 신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그리고 이 미안함의 가장 큰 몫은, 특별히 전례 생활에서 많은 부분을 학생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지내면서는 제 자신의 영적 삶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양성자로서의 모범이 되기 위해 신학원 생활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전례 생활이 있지요. 그런데 몸이 피로해서 아침기도는 함께하지 못하고 미사시간에만 겨우 맞추어 나가는 날들이 이번 학기에 특히 많았습니다. 또 저녁기도 시간에도 신학교 외부에 일이 있어서 나가거나, 더 많은 경우에는 방에 있으면서도 강의 준비 때문에 기도에 참여하지 않았던 날들이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안함을 넘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상황에 불평하면서 제 스스로를 변호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누군 기도시간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 안 나가나? 나도 나가고 싶은데 상황이 이런 걸 어떡해!’ 지난 학기 말, 어느 아침미사 때의 일입니다. 이미 그때부터도 슬슬 아침기도에 못 나가는 날이 많아지던 때였죠. 미사 중에 복음 봉독 시간이 되어 자리에 앉았는데,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 10,21)라는 복음 첫 구절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 불쑥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게 뭘까?’ 이내 저는 그것이 예수님께 대한 심술 아닌 심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나는 이렇게 일이 많아서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님은 뭐가 좋으시다고 혼자 즐거워하시는 건가?’ 하루 종일 이 마음을 성찰하면서, 저는 다시금 제가 ‘나 중심’의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신학교 소임 중에 하는 많은 일들은 제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입니다. 신학생 생활지도도 그렇거니와 강의나 기타 외부에서 맡게 되는 일도 모두, 제가 하고는 있지만 저의 일이 아닌, 교회의 일,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제 힘으로만 하려고 하니 일하는 것이 힘에 부치고 그래서 일에 대한 걱정, 불안이 계속 쌓여갔던 것이죠.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제 일인 것 마냥 해나갔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모습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학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난 학기보다 더 바쁘게, 힘들게 지냈고 그래서 기도 시간에도 더 많이 참여하지 못했지요. 여전히 ‘나 중심’으로 지내는 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 중심으로 지내는 제 모습을 두고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가장 먼저 다가오는 마음이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이니까 이 마음부터 돌봐야 하겠죠? 그런데 이 마음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요?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