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 미국 방문 특집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5-10-06 수정일 2015-10-06 발행일 2015-10-11 제 2964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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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약자·기후 문제 등에 대한 현실적 정책 촉구
美 의회와 UN 총회 연설
도로시 데이·킹 목사 등
‘공동선 헌신한 모범’ 제시
“탐욕에 의한 환경 파괴 가난한 이에 직접적 피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사목방문 중 9월 25일 유엔총회서 연설하고 있다. 【CNS】
교황은 쿠바를 9월 19일부터 방문한 뒤 23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27일까지 엿새 동안 머물렀다. 교황의 이번 방문은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의 주요 현안들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라는 의미에서 전 세계에 광범위한 여운을 남겼다.

특히 오랜 사회적 쟁점이었던 낙태, 사형제 폐지 등 생명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 기후 변화 협약 등 환경 보호 문제, 유럽을 휩쓸고 있는 이민자 문제 등을 둘러싼 논쟁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적 입장을 피력하는 교황의 강한 메시지들은 이미 올초부터 세간의 관심사였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대로 교황은 이번 순방을 통해 가는 곳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이전에는 조심스럽고 애매했던 입장들을 보다 선명하고 단호하게 피력했다. 그리고 교황의 메시지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이른바 ‘진보’의 색이 짙었다.

일부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순방 메시지들은 이전에 비해 다소간 무뎌졌고, 낙태 문제 등에 대한 입장도 변화가 없으며, 성직자 성추행 문제에 대한 미온적 대처로 비판받는 미국 가톨릭교회의 노고를 ‘치하’하거나, 원주민들을 강제 개종시킨 선교사 후니페로 세라(1713~1784)를 시성하는 등으로 인해 진보와 보수 양측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또한 가톨릭의 정체성에 ‘충실’한 일부로부터 진보적인 입장 표명과 관련해 노골적인 불만을 받는 것도 사실이고, 미국의 국익 혹은 사회적 기득권을 보유한 엘리트 계층들은 반사적인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이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이미 충분히 정리된 교회의 새로운 복음화 사명에 근거해, 고통 받는 개별 가정을 위한 사회적 보장에서부터 약자를 억압하는 폭압적 국제 경제 질서에 대한 거시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순방의 가장 뜨거운 관심의 대상은 의회와 유엔 본부 연설이었다. 세계의 최고 정치 권력들을 앞에 두고 한 두 연설 모두에서 교황은 현재 지구촌의 주요한 현안들을 모두 다뤘다. 특히 교황은 공동선에 대한 정치와 경제의 무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적 구조,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의 보호 등을 촉구하고, 참되게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새로운 정책들과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역사상 최초로 이뤄진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교황은 51분에 걸쳐, 정치 지도자들은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일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이어 그 모범으로서 극단적인 평화운동가이자 가톨릭노동운동의 창시자인 도로시 데이와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 사회적 활동으로 알려진 영적 스승 토마스 머튼을 꼽았다. 교회 밖에서는 에이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과 미국 시민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들었다.

교황은 이들 네 명을 공동선에 헌신한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이주민에 대한 열린 자세, 종교적 근본주의의 문제, 국제적인 평화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또한 사형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기후 변화 문제 등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미국과 미 의회의 역할을 당부했으며, 특별히 “피, 무고한 이들의 피에 적셔진 돈”을 위한 무기 거래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25일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이뤄진 연설에서 교황은 “우리가 다루는 것은 단순한 계획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살고, 투쟁하며, 고통 받는, 그리고 때로는 강제로 모든 인권을 박탈당한 채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가야 하는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모든 국내외 정치 경제 정책의 기반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 193개국 정상들이 자리한 총회에서 교황은 “이기적이고 제한없는 권력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탐욕은 자연 자원을 오용할 뿐만 아니라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서 환경 파괴와 인간에 대한 억압·배제가 함께 감을 강조했다. 교황은 이러한 “경제적이고 사회적 배제는 인류의 형제애에 대한 거부이고 인권과 환경에 대한 무거운 침해”라고 말했다.

교황은 그밖에도 국제 금융기구들을 향해, 국가들이 “억압적인 대출시스템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전면적인 핵 무기 금지가 시급하다고 지적했으며, 마약밀매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교황은 그러나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교황이 9월 23일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있다. 【CNS】
9월 25일 교황이 9·11 테러 현장인 뉴욕 ‘그라운드 제로’를 찾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잔해로 만든 철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CNS】
9월 23일 워싱턴 성모 무염시태 국립 대성당에서 수녀들이 교황을 보기 위해 서 있다. 【CNS】

이민자 안아주고 노숙자 격려… 따뜻한 교황 미국을 감싸다

-이민자, 난민들에 대한 관심

최근 유럽을 휩쓸고 있는 난민, 이주민 문제들에 대한 교황의 관심어린 언급은 방미 기간 동안 계속됐다. 9월 23일 워싱턴에 도착,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행사에서부터 교황은 스스로를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소개하고 그러한 ‘이민자 가정들로 이뤄진 나라’에 와서 기쁘다고 말했다.

이튿날 의회 연설에서도 교황은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여러분 상당수도 그런 이민자 가정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시내 카퍼레이드 중에는 멕시코 출신의 불법 이민자 가정의 어린 딸을 안아주고 편지를 받아드는 장면 역시 교황의 이민자들에 대한 관심을 상징했다.

난민 문제와 관련해서 교황은 “오늘날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난민 위기를 맞고 있다”며 “그들의 숫자에 놀라서는 안 되고 그들을 오직 인간으로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회 연설, 50분간 총 37차례 박수

최초로 의회 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긴 프란치스코 교황의 50분간의 연설 동안 무려 37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감동적인 대목에서 이끌어내진 기립 박수는 연설 도중 11차례나 이어졌다.

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 의원들은 각자 자기 당의 정책과 반대되는 대목에서는 일어서지 않는 모습이었다. 교황이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의 입장인 기후변화 협약에 대한 적극적 지지 입장을 표명할 때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전통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에는 공화당 의원들이 먼저 기립해 박수로 응답했다.

교황의 연단 뒤편에 자리잡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조 바이든 부통령 역시 수시로 박수 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히 베이너 하원의장은 교황의 연설에 감명 받아 눈물을 흘렸고, 급기야는 세속적 성공을 뒤로 하고 의장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낮은 곳으로의 행보

교황은 이번 순방에서도 낮은 곳으로의 행보를 변함없이 이어갔다. 23일 워싱턴에서 의회 연설을 마친 뒤 성 패트릭 성당을 방문한 교황은 이곳에서 미국 가톨릭구제회가 운영하는 200여 명의 저소득층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사회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근의 가톨릭구제회 사무실 앞에서 운영되는 무료 급식처에 들러서는 사람들과 함께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미소를 띤 채 “많이 드세요”(Enjoy your meal)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교황은 이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손을 흔들고 악수를 나눴다.

교황은 여기에서 “하느님의 아들도 노숙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도 노숙인으로 살아가는 것, 잘 지붕도 없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교도소를 방문해 재소자들을 위로했고, 뉴욕의 할렘가를 찾아 이민자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방문했다. 9.11 테러 희생자 유가족들을 만나 서로 끌어안고 함게 슬픔을 나누기도 했다.

교황이 9월 24일 미 의회 연설을 마친 뒤 미국 가톨릭구제회가 운영하는 무료급식처에 들러 가난한 이웃들과 인사하고 있다. 【CNS】
9월 23일 워싱턴 경로 수녀원을 방문한 교황이 102세 마리 수녀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CNS】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