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꿈
나는 평소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성경을 읽다가 구약의 요셉이 꿈을 통하여 계시 받는 대목에 이르면 그저 부럽기만 할 따름이다. 그런 나에게도 유독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하나 있다. 신학교 입학 첫해, 학기가 시작된 지 채 한 달이 못되었을 때 꾸었던 아버지에 대한 꿈. 그 꿈은 장면 하나하나가 지금도 뚜렷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진 타잔 밧줄을 타고 나타나셔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셨다. 회색 빛 평화의 마을. 그곳의 사람들은 질서와 침묵 중에 저마다 무언가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면의 회한이 역력한 가운데 그곳을 지배하는 기운은 어렴풋한 희망이었다. 무언가 자신의 몫을 묵묵히 채워가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은 낯익었던 얼굴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꿈속에서 내가 “아버지, 아까 그 사람 어디 갔어요?”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무덤덤하게 말하셨다.
“몰랐냐? 그 사람은 자기 몫을 다 채워 저 윗마을로 올림 받았어.”
올려다보니 그 마을에서는 형언할 길 없는 서광이 신비롭게 아랫마을을 향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아버지는 다시 타잔의 밧줄에 태워 지상으로 데려다 주시고는 “나 이제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훌쩍 사라지셨다. “자기 몫이라?”, “올림을 받는다?” …. 나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던 끝에 그 시절 겨우 입술에 익혔던 라틴어 성모송을 외우다 잠에서 깨었다.
이 꿈을 나는 내가 꿨던 것 가운데 유일하게 영성적으로 의미 있는 꿈으로 여기고 있다. 아버지가 받은 특은을 내게 알려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로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하여 세례성사와 혼배성사만 받았지 전혀 신앙생활을 못하고 세속적으로만 사시다가 홀연 죽음을 맞이하여 자신의 공로로는 ‘연옥’ 근처에도 못 가실 처지였다. 나는 살아생전 아버지가 성호를 긋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하지만, 54세 때 되던 해 뇌일혈로 쓰러지셨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의 세례명이 ‘루수’라는 사실을 알려줘 병원 주변의 본당 신부님께 청하여 병자성사(당시 ‘종부성사’라 불렀음)를 받게 해 드렸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저런 꿈이 내게 왔다. 이것이 은총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누가 봐도 신앙에서 멀었던 한 생애, 그리고 세례, 혼배, 종부라는 세 성사! 이 극명한 대조를 엄연한 사실로 전제할 때, 그 꿈은 내게 적어도 두 가지 뚜렷한 깨달음을 주었다. 첫째, 하느님의 은총이 죄보다 크다는 사실! 둘째, 연옥은 “있다 없다”의 문제를 넘어 죄인이냐 악인이냐의 갈래에서 어중간한 위상에 있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
■ 영원한 삶
이제 사도신경 마지막 고백이다.
‘영원한 삶’은 라틴어 원문에서 ‘비탐 애테르남’(vitam aeternam)이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비탐’은 ‘생명’, ‘삶’을 가리키며, ‘애테르남’은 ‘영원한’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삶은 우리의 희망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손에 잡히듯 묘사하지 못한다. 가봐야 알 따름이다.
남미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선교사 신부가 한 가난한 동네에서 선교를 했다. 신부가 매우 잘 해 주니까 신자들도 점점 늘어났고, 고마운 마음에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고구마, 고추 등과 같은 농산물을 그 신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어떤 한 형제가 잔뜩 미안한 얼굴로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도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제 선물은 가지고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오시면 드릴 수 있어요.”
신부가 그의 집을 방문했더니 형제는 뒤란을 가리켰다. 그 순간 황금빛 해가 지는 석양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이었다. 형제가 말했다. “우리 집의 이렇게 아름다운 장관을 보고, 저는 늘 ‘아! 이것이 바로 신부님이 말씀해 주신 천국의 모습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부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답니다. 자, 저희 집에서 맘껏 누리다가 가세요.”
그렇다. 저 위의 천국은 가져올 수 없다. 우리가 가는 수밖에.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특히 ‘천국’에 대한 개념도 희망도 없이 막 사는 인생들을 볼 때, 그들에게 닥칠 종말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차라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후세계에 대해 정신이 번쩍 드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살아생전 호의호식하던 부자는 죽어서 저승에 갔다.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아브라함 곁에는 자기 집 문 앞에서 구걸할 때 못 본 체했던 라자로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자는 애원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루카 16,24).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지 않느냐.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오갈 수가 없구나”(루카 16,25-26 참조).
부자는 그렇다면 살아 있는 자기 다섯 형제에게만은 라자로를 보내주어 경고해 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해 줄 뿐이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이것이 사태의 슬픈 본질이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지옥을 피하는 길을 수없이 가르쳐주었지만 인간은 완악함으로 귀를 막고 딴전을 부렸다. 그러니 그 외고집을 청산하지 않는 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 식별이 필요하다
서두에서 기껏 꿈 얘기를 장황하게 했지만, 이쯤에서 다시 식별의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사후 세계에 대해 상상하는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경도 신학도 사후의 생명에 관하여 충분한 빛을 비춰주지는 않는다.”(교황청신앙교리성성, <종말론의 몇가지 문제점에 관한 서한>(1979.5.11))
실제로 교회문헌들은 사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서 암시만 하고 있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막 설명을 해 주고 있지는 않다. 왜인가? 어차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차원 세상에서 우리는 그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위험하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나는 ‘꿈’ 이야기를 하면서도 상황 묘사에 집착하지 않았다. 단지 기억된 그 이미지에서 성경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읽으려는 노력에 영적 식별의 촉을 곤두세웠을 따름이다.
차제에 ‘임사체험’이라는 것을 짚어보기로 하자. 근래에 천국에 잠시 다녀왔다며 체험담을 엮은 서적들이 번역되어 보급되고 있다. 주의를 요하는 것은 그런 책들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이 복음서의 종말진술과 합치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종말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만을 조장하는 내용을 마치 공식적으로 인정된 진실인 양 기록하고 있다. 엄밀히 따져보면 복음서의 진술과 상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고로 밝히거니와 심리학자들은 대부분 소위 임사체험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심리상태가 반영되고 투사되어 그려낸 환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천국, 연옥, 지옥에 대한 정통교리는 모두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계시와 신학적 사유가 어우러져 형성된 것들이다. 그러기에 전적으로 믿고 따를 만하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