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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톨릭 박해사] (14) 가경제~아편전쟁 전-가경제의 박해 (2)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2-02-14 수정일 2012-02-14 발행일 1997-08-03 제 206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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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선교사 외 북경 출입 못해 
교리서 등 서적출판 일체 금지
「외국간첩」「풍속문란」등 죄목 적용해 처벌
1805년 어사 채유옥은 서양 선교사들의 책 출판을 엄금시켜야 한다고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선교사들은 그동안 북당에 인쇄소를 설치하고 종교서적 뿐만 아니라 일반서적까지도 출판하였다. 북경에 공직하는 선교사들 외는 북경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서양 선교사가 체포되면 「외국 간첩」「치안 유지를 방해한 죄」「사교유포죄」를 적용하여 처벌하였다. 정부에서 선교사들이 한문이나 만주 문자로 교리서를 출판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일반서적 출판까지도 일체 금지하였다. 옹정, 건륭, 가경, 도광, 4황제의 금교 박해정책은 1백 년 이상 계속되었다.

월남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19세기 초에 마카오를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가는 길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에서 변방을 엄하게 지키고, 두 번째는 포르투갈이 보교권을 남용하여 스페인 등의 선교사가 마카오를 경유하여 중국 내지로 들어가는 것을 적극 저지하였다. 살베티 신부는 마카오를 경유하여 내지로 가려다 체포되어 심한 형벌을 받고 3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하였다. 선교사들은 이 길을 택하지 못하고 월남으로 가서 순홍을 경유하여 중국의 운남성 사천성으로 하여 산서성에 이르게 되는데 이 길은 매우 험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까스타놀레 신부는 1806년 월남의 순홍에서 중국 운남성 사천성을 경유하여 산서성에 도착하였는데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피골이 상접하여 「불성인형」이 되었다고 한다. 1806년 황족 소노의 증손 도흠(미카엘)과 도민(라파엘)이 천주교 교우였는데 도민은 북당의 선교사들과 5, 6년을 함께 거주하며 선교를 하였다. 형부에서 여러 번 배교를 권유했으나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배교하지 않자 도민의 신분을 격하시켜 이리로 충군시켰다. 박해시대 교우들에게 충군 형을 많이 과하였으며 이리로 충군을 많이 하였다. 조정에서 천주교가 종실까지 침투하여 만인 통치에 위해를 주었다고 규정하고 천주교 박해를 더 심하게 하였다.

1806년 9월 30일 광동 순무 손옥정이 보고하기를 산서 양곡현의 이여가 마카오의 서양 선교사를 끌어들여 고향에서 선교하게 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예 요셉과 이태리 살비에티 신부가 교우 맥병충의 배를 빌려 타고 불산을 출발하여 낙창에 이르러 체포되었다. 이여와 진요 왕은 이리에 신부을 격하시켜 충군시키고 맥병충은 극변에 충군시켰다. 살비에티 신부에게는 광동에 종신 감금형을 과하였다.

1806년 박해 후에도 여전히 궁중에는 서양 선교사 11명이 공직하고 있었으며 북경의 교무는 진전되어 가고 있었다. 그 외에 지역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이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며 중국 신부들과 평신도 전도원에 의해 비밀리에 선교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811년 상해에서 교난이 또 발생하였다. 상해에서 신부가 체포되었는데 관리 교우의 관면혼배 위임서가 몸 수색에서 나왔다. 어사가 서양 선교사가 개인의 혼인문제까지 관여할 정도로 대권을 쥐고 있다며 천주교를 「참초제근」해야 된다고 상소를 올렸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1811년 7월 19일 황제의 조서가 내려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궁중에서 공직하던 선교사들도 비밀리에 선교할 수 없게 되었다. 군인 2명씩을 북경 성당에 파견하여 성당 문을 지키게 하고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관리가 천주교를 믿으면 파직시켰다. 천주교에서 학당 세우는 것을 금지하고 교우들이 체포되면 잔혹한 형벌을 하였으며 신부가 있는 곳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으면 중형을 과하였다. 각지에서 서로 다투어 신부와 교우들을 고발하였다. 1811년 황제의 조서를 보고 궁중에서 공직하던 서양 선교사 4명은 본국으로 가기 위해 광주로 갔다. 이때 산서성 섬서성 박해가 가장 심했다. 북경에서 공직하던 선교사들까지도 축출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북경의 교우들은 내몽고 서만자로 피신하였으며 서만자 일대는 북부 교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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