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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교회 근세사] 31. 영남의 옛 본당들 4. 부산포본당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27 수정일 2011-05-27 발행일 1983-06-26 제 136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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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설립-영도에 임시 성당 대청동 거쳐 초량동으로 이전
마산포(馬山浦)와 진주 문산(文山) 두본당 첫 사목 순방을 끝낸 드망즈(安世華) 주교는 1912년 1월 16일 철도편으로 신 마산역을 출발, 초량(草梁)역에서 하차하셨는데 초량역은 경부선 철도의 시발지로서 가장 먼저 세워진 역일뿐 아니라 당시 부산본당은 초량(釜山府 草梁洞 3동 47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본당 제7대주임 마리오ㆍ율리엥(M.julien 權裕良) 신부의 영접을 받으며 주교 일행은 초량성당에 드셨는데 부산본당은 드망즈(安) 주교님이 10여 년 전「빠리 외방전 교회」선교사로서 한국에 입국하여 처음 사목을 맡아 제4대 본당신부로 1년간 전교한 지방이다.

산이 솥모양(釜形)이라 해서 부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부산포(釜山浦)는 옛 삼국시대 가락(駕洛)국에 속한 땅이며 동쪽에 이웃한 동래(東萊)는 신라의 영토였으므로 한반도의 동남 끝인 이 지대는 국경 지대였다. 1592년 임진왜란 (壬辰倭亂)을 계기로 동래는 부(府)로 승격되고 부산은 일본과 국교가 트이자 부산포(浦)로 일본 내왕의 길목이 돼 1876년「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韓日條約)에 의해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장(開港場)이 되었다.

용두산 일대는 일본의 조개지(祖開地)로서 일본에 의해 본격적인 항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었다.

경남지방의 복음 전래는 신 유교단(1801년)후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경북의 영양 청송 진보 안동 등 산협 지대로 옮겨와 살다가 1815년(乙亥)년과 1827(丁亥)년의 경상도 지방 박해와 1839(乙亥)년 교난으로 다시 남하한 신자들이 경주 언양 울산 기장 동래 지방으로 옮겨 살게 되고 한편 상주 칠곡 성주 등으로 피난한 신자들은 다시 낙동강 유역 따라 밀양 김해 양산 등으로 이동하여서 복음의 씨앗이 골고루 퍼지게 되어 1861~1864년 복자 안또니오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순회 전교하던 시절 동래는 영남 지방 교회의 중심지가 될 만큼 활발했다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가혹한 천주교 탄압이던 병인 대교난(1866년)으로 유명 무명의 많은 순교자를 내고 남은 신자들은 각처로 피난하게 되어 신교의 자유가 허용될 무렵 동래 교회는 폐허가 되다시피 된 상태였다.

1886년 영남 지방의 첫 본당인 대구 본당이 설정되었으나 로베르(金保祿) 신부가 대구 읍내로 부임하지 못하고 칠곡「신나무골」에서 경상도 전역 전교를 담당하고 있을 때 부산지방도 대구 본당 관하의 전교지였다가 1889년 부산 본당이 설정되고 그해 2월 16일 입국한 모이세ㆍ조조(M.Jozeau 趙得夏) 신부가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부임 하기 앞서 「신나무골」에서 우리말을 재구며 준비하여 1890년 4월 영도(影島)공소의 회장이며 부산 본당 첫 신자이기도 한 김보윤(로무알도)의 안내로 대구「송골」(새방골)의 이장언(李章彦=프란치스꼬)을 대동하고 영도「조내기」(潮洛里=靑鶴洞)공소로 부임하였는데 조조(趙) 신부는 초가 한채를 지어 임시 성당을 마련하고 동래 울산 언양 밀양과 거제도 통영 진주 등 여러 지방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찾아 열심히 순방 전교를 하다가 1893년 봄 호남 지방으로 전임되고 후임으로 바오로ㆍ우도(P.Oudot 吳保祿) 신부가 부임하여 조조(趙) 신부가 박해 시대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절영도(絶影島)「조내기」에 임시로 마련했던 본당을 대청동 징검다리 근처(大廳洞 2가15번지)로 옮기고 영도에는 공소를 두기로 했다.1898년 우도(吳) 신부는 황해도로 전임되고 제3대주임으로 에밀ㆍ따께(E.Taquet 嚴宅基) 신부가 부임했다가 진주로 전임됐으며 제4대주임으로 드망즈(安) 신부가 1899년 부임, 장차 부산항의 중심지가 될 초량 방면으로 본당을 옮길 계획을 게우다가 1900년 용산 신학교로 전임된 후 제5대 톨트(J.Rault 盧若望) 신부가 본당을 초량으로 옮겼던 것이다. 1902년 전염병자에게 도유 성사를 주고 병에 전염되어 그해 9월 13일 선종한 톨트(盧)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제6대 주임 루도비꼬ㆍ쟝드르(l.Gendre 崔昌根) 신부는 부산에서 7년간 전교하고 1908년 개성(開城)으로 전임됐으며 그 뒤를 이어 제7대주임 올리엥(權) 신부가 부임하여 새 교구의 새 감목 첫 사목 순방을 맞이한 것이다. 1910년의 부산 본당 교세는 신자 총수 1천4백27명, 공소 25개소였다.

사진제공=정성길·한국민속홍보센타, 해설=윤광선·영남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