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1-04-27 수정일 2011-04-27 발행일 2011-05-01 제 274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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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세월 함께 나눈 ‘복음화의 전우’
일제·공산정권 억압 이겨내며 한국의 고난 극복 동참
현재 노동사목·복지사업·평신도선교사 파견 등 앞장
서울 동소문동 6가에 위치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센터. 선교지 정보와 사전 교육 등을 제공하기 위한 교육 시설의 필요성에 의해 2003년 건립됐다.
■ 한국교회에서의 세월

고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1993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6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언제나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데 민감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특히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헌신하는 골롬반회 신부님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특수사목에서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분산되고 흩어져 사는 사람들과 어려움에 부딪힌 사람들의 필요에 꼭 맞는 사목을 창안하셨습니다.”

김 추기경의 회고처럼,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지부가 78년 세월 속에서 일관되게 지켜온 정신은 ‘시대적 요구에 앞장선 응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골롬반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도착한 날은 1933년 10월 31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었다. 당시 서울대목구장은 원형근 아드리아노 주교, 대구대목구장은 안세화 플로리아노 주교였는데,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던 이들이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 것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이날 도착한 10명의 선교사들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공부를 마친 후 1934년 광주·제주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부터는 춘천으로도 파견됐다.

그때 광주에서 사목활동을 했던 매리난 신부 회고에 따르면 “본당 관할 공소가 26개나 되었기에 전교회장, 복사와 함께 공소 방문을 나가면 공소 회장 집에서 오래 머물러야 했고,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주로 전교회장을 통해 「요리 강령」이라는 그림 교리책으로 전교를 했다”고 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일본 경찰들은 골롬반 선교사들을 스파이 혐의를 들어 감옥에 가두고 사제관에 연금시키는 행태를 보였다. 연금 상태서, 또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영양실조와 제때 치료하지 못한 질병으로 희생되기도 했는데, 1945년 해방이 돼서야 선교사들은 비로소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교회가 부흥기를 맞았듯 골롬반 선교사들도 그간 못 다한 활동을 벌였다.

6·25 전쟁은 선교사들에게 더 큰 고초를 안겼다. 당시 공산당에 체포된 9명의 신부들 중 7명은 살해되고, 춘천지목구를 맡았던 퀸란 신부는 ‘죽음의 행진’ 끝에 시베리아를 경유, 기적적으로 생환했고 후에 다시 한국 땅을 밟기도 했다.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재건 노력 속에서 골롬반 선교회도 어려움 극복에 함께 동참했다. 잿더미 위에 쓰러진 성당을 다시 세우고, 또 공동체를 조직하고 해외 원조를 통해 전후 피해자들을 돕는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교회가 봉헌한 성당은 127여 개에 달했다.

1960년대 말부터 보이기 시작한 도시집중화 현상은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이들을 쏠리게 했다. 이런 상황서 선교회를 통해 서울 지역에서만 23개 본당이 건축됐다. 본부로부터의 선교사 영입도 보다 활발해 져서 1970년에는 인원이 153명까지 늘어났다. 1977년에는 9개 교구에서 72개 본당을 맡았다. 특히 1953년에는 레지오마리애를 도입, 한국 신자들의 신심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인 사제가 늘어나면서 골롬반 선교사들은 교구 사제들 손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 사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도시화 영향으로 발생되는 제 문제들에 대응키 위해 노동사목, 야학운영, 카운슬러, 병원사목 등에 눈을 돌렸고 빈민사목, 노인 복지, 장애인 복지, 피정 지도 등 분야에도 참여하게 된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설정 200주년을 지낸 이후 한국교회 내에 해외 선교의 필요성과 관심이 고조되면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한국교회가 보다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활동 초점을 맞췄다.

선교회 총회를 통해 비영어권 지역 출신자들도 회원으로 영입될 수 있는 방안이 결정되자 한국인 신학생 지원자들을 받아들였으며 한국교회 최초로 외방선교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 제도를 도입했다. 또 교구 사제들의 선교사 체험을 돕는 지원사제 프로그램을 시도했고 해외 파견을 앞둔 선교사들을 위해 교육을 마련했다.

해외로 파견되는 평신도 선교사에게 안수하고 있는 모습.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한국교회 최초로 외방선교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 제도를 도입했으며, 지속적인 선교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같은 선교회 흐름은 25년전 본당 사목에 주력했던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선교의 패러다임을 달리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더욱 선교적 공동체로 성장하도록 협력하는 체제로 전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003년 건립된 골롬반 선교센터는 그런 바람의 결집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1~3월 중 해외 선교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열리는데, 금년에도 파견을 앞둔 50여 명 선교사들이 기본적인 선교 개념과 소양들을 익히고 있다.

2013년 한국 진출 80주년을 앞두고 있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 지부의 이 같은 발걸음들은 한국 역사와 사회 안에서 격동의 시기를 함께한, 마치 ‘전우’를 보는 느낌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 순교 사제 기념비.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일곱 사제들의 삶과 신앙을 현양하고자 마련됐다.
그 세월동안 성골롬반선교회에서는 총 260명 사제들이 일했다. 그중 100명이 선종했으며 22명은 그들이 소임을 다했던 한국 땅에 묻혔다. 현재는 32명 회원이 본당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6명의 한국인 회원도 배출됐고 10여 명의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 역시 세계 각국에서 활동 중이다.

한국지부장 오기백 신부는 “앞으로도 사회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분야에 새롭게 도전하는 활동은 계속 되어질 것”이라고 했다. 또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교회 안에서, 이제 수적으로는 작은 그룹이고 또 그로 인해 능력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문화 간 교류를 활성화 시키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인종 언어는 달라도 세상 모든 이들이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선교’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