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특집]박완서씨 장례미사 참례기

입력일 2005-04-24 수정일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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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가 4월 8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5시) 바티칸 현지에서 거행됐다.

한국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등으로 구성된 한국교회 조문단 외에 이해찬 국무총리, 소설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손병두(요한보스꼬) 한국평협회장, 봉두완(다위) 한국천주교민족화해센터회장 등으로 구성된 민관합동조문단이 대표로 참례했다.다음은 민관합동조문단 일원으로 장례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온 박완서씨가 교황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보내온 참례기다.

외교 통상부로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조문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로마에 가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너무 놀라서 그랬던지, 천성이 미련하여 그랬던지, 그 일이 영광이라든가 은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나이와 건강이 장시간 비행 후 쉴 틈 없이 의식에 참가하는 고된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내 몸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서 그 일정동안에 피치 못할 약속이 있는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못갈 것 같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약속이 있긴 있었지만 가족이 모여 성묘가기로 한 약속을 그렇게 크게 부풀려 말하는 내가 문득 싫어지면서 네,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싫으면 그만 두라지 하고 즉시 전화를 끊지 않고 설득을 계속해 준 장관님께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다.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교황님의 선종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깊은 슬픔과 함께 기쁨에 가까운 안도감을 맛보았다. 하느님이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시선과 미소가 저러하시리라 믿어지던 절대적으로 선한 교황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리라는 게 슬펐지만, 하느님의 대리자도 결코 비켜가지 않은 인간적인 병고에 시달리시면서도 하느님의 대리자로서의 고된 임무를 다 하시는 모습이 뵙기에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마지막까지 존엄성을 잃지 않고 선종하셨다는 속보에 접했을 때 마침내 그 힘든 짐을 내려놓으셨구나 싶어 크게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조문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로마에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떠나기까지 준비할 건 검정 옷 한 벌이면 충분했지만 나에게 왜 이런 분에 넘치는 일이 생겼을까 감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조문 여행 중 동행하는 분들께 근심이나 폐를 끼치면 어쩌나, 일행 중 가장 연장자라는 나이를 의식한 걱정도 여전했다.

아침 9시 45분 비행기로 떠났는데 로마에 도착한 시간은 그날 저녁 8시경이었다.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느라 지체한 시간까지 합치면 장장 17시간이나 걸린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공식 조문 사절단이라 편리한 점이 많았다. 비행기 좌석도 편안했고 보통 여행보다 수속이나 기다리는 시간 등 신경 쓸 일 없이 신속하고 매끄럽게 넘어가니까 한결 덜 피곤했다. 내 생전에 처음 경험해보는 분수에 넘치는 호강이어서 이래도 되는 걸까, 조금은 송구스러웠다.

그날 밤은 성염 주 교황청대사 관저에서 이태리식 만찬이 있었고 곧 호텔에 들었다. 내일로 박두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각국의 수뇌, 왕족, 귀빈, 조문 사절단, 몇 백만의 일반 조문객 등으로 로마가 얼마나 만원이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던 터라 아무리 공식 조문 사절단이라 해도 천막에서 자도 그만이라는 각오까지 했었는데 뜻밖에 좋은 호텔에 들게 되어 꿈만 같았다.

그러나 시차와 근심 걱정, 긴장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승용차로 간다 해도 내일 아침 그 많은 인파를 뚫고 과연 제 시간에 바티칸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내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리 없는 걱정은 안하는 게 수라는 걸 알만한 나이가 됐건 만도 그 모양이었다.

호텔은 바티칸에서 얼마만한 거리에 있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행사 차량이라는 표시를 단 승용차는 이해찬 총리가 탄 차를 선두로 정시에 출발했다. 인도는 매우 붐비고 있었지만 행사 차량 외의 차량은 통행이 금지 돼 차도가 서울의 차도보다 훨씬 좁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는 잘 빠졌다.

대표단은 바티칸 대성당을 통해 귀빈석이 마련된 광장으로 나가게 돼있었다. 성염 교황청대사가 우리를 인도했다.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장엄한 대성당을 지나 광장으로 통하는 문 앞에는 아름답고도 경건한 주교복장을 한 주교님들이 도열해 서서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했다. 우리에게는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그 친근한 한마디에 나는 비로소 내가 올 데를 왔다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2000여석의 귀빈석은 조문사절단이 아직 입장 중이라 뒤에 빈 자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 넓은 바티칸 광장은 이미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 있었다. 400만의 조문객이 로마에 모였다하니 광장까지 못 들어온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각국을 대표하는 왕이나 대통령 수상 등의 자리는 앞자리에 따로 마련돼 있어 이해찬 총리는 거기 앉고 우리는 뒤의 빈자리에 자유롭게 앉았다. 귀빈석에는 나라의 크고 작음이나 인구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다섯 석 정도의 자리를 배정 받았노라고 성염 대사가 일러주었다. 열시에 장례미사가 시작되기까지 잠시 기다리는 동안도 우리의 이해찬 총리는 쉬지 못하고 각국의 수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는 한눈팔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귀빈석에는 100여개나라의 조문 사절단이 자유롭게 뒤섞여 앉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피부색만 다른 게 아니라 복장으로 봐서 가톨릭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또는 적대 관계인 것처럼 알려진 종교지도자의 복장도 많이 눈에 띄었다.

어느 나라인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뒤쪽에는 영국 부레야 총리 부처의 모습도 보였다. 왜 각국 수뇌들이 앉는 앞자리에 앉지 않았을까 했더니 앞자리는 어느 나라이고 한 자리 씩만 배당이 되니 찰스 황태자가 거기 앉았을 거라고 누가 일러주었다. 각국 수뇌 중엔 부시 미국대통령이 가장 나중에 들어왔다가 제일 먼저 나갔다고 하는데 나는 잘 보지 못했다.

초강대국으로부터 종교가 다른 작은 나라 지도자까지 왕족 귀족으로부터 침낭을 메고 걸어온 젊은이들까지 한결 같이 애도하는 그는 누구인가. 가난하고 억압 받던 작은 나라 폴란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인물이라 이번에는 아프리카 사람이냐고 묻는 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주로 이탈리아 추기경이나 될 수 있었던 전통을 깨고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교황은 위대했다. 일찍이 이 지구상에는 없었던, 가히 세계장(葬)이라 부를만한 고별의식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교황청의 대외정책의 기조는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평화추구이다. 일찍이 교황 비오 12세는 교황청의 그런 이상을 이렇게 요약해 말한바 있다. 『가장 고매하며, 커다란 가치의 상징인 소국 바티칸의 전쟁능력은 무에 가깝다. 그러나 그 평화에 대한 능력은 무한으로 크다』 그 아름답고 거룩한 이상에 몸 바치고 실현한 게 바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일생이었다. 어찌 경배하지 않겠는가.

교황을 애도하는 몇 백만 조문객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비통하기만 한 것도 경건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성가는 영혼을 속세에서 해방시켜 들어 올리듯 황홀했고, 교황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가 남긴 업적을 낭독하는 동안 광장에서 터져 나온 십여 차례의 박수와 환호성, 그때마다 물결치던 폴란드 국기를 비롯한 각국의 깃발, 그건 애도라기보다는 환호에 가까웠다.

슬픔과 환희가 이렇게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본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놀랍고 아름다운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의 김수환 추기경님을 비롯해서 각국의 추기경님이 참석한 추기경님 석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톨릭이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보수적이고 늙은 종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교황님에 대한 애도와 사랑과 긍지를 박수와 깃발을 통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조문객은 다들 폭발할 듯이 젊고 발랄해서 이런 젊은 피가 가톨릭을 끊임없이 쇄신케 하여 영원히 늙지 않는 종교로 만들리라는 뿌듯한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교황의 소박한 관이 지하에 안치되기 위해 베드로성당 죽음의 문을 통과할 때도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나도 덩달아서 크게 박수를 쳤다. 그 때 가슴 속 저 밑바닥을 화끈하게 한 느낌은 슬픔도 기쁨도 아닌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감동이었다.

이 세기의 장례미사는 보나마나 CNN으로 전 세계에 중계 될 텐데 앉아서 편히 구경하지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어렵사리 걸어서까지 거기 오며, 또는 오고 싶어 하는가. 전통이 유구한 장엄한 종교의식에 직접 몸담아 보고 싶은 인간 심리 중에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확인 받고 싶은 것도 있는 게 아닐까.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걸 크나큰 은총으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