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유박해 순교자들 (37·끝) 황심 토마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입력일 2001-12-16 수정일 2001-12-16 발행일 2001-12-16 제 227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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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왕래한 믿음직한 밀사
주문모 신부 밀입국 돕기도
황사영 백서에 서명
북경 전달 직전 체포
황사영은 그의 백서를 북경 주교께 전달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미 1798년과 1799년 쇄마구인(刷馬驅人)의 명색으로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께 전달했던 적이 있는 황심에게 맡기고자 했다. 황심은 부연사행의 말몰이꾼으로 자주 북경을 내왕하는 교우 옥천희와 연락하여 밀송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01년 초가을 옥천희가 국경에서 체포되고 그의 실토로 11월 1일 황심이 서울에서 검거 당했다.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여 교우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황심은 황사영의 은신처를 말해 황사영마저 체포되고 백서는 압수 당해 북경 주교께 밀송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의 신앙동지들과 같이 국청에서 어떤 교우보다 혹독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다. 12월 1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황심, 김한빈, 옥천희와 현계흠 등이 참수 치명하여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 때 황사영은 동지들과는 달리 백서의 작성자로 새남터에서 능지처참 육시의 형을 받았다. 황사영의 가산은 몰수되고 늙으신 어머니 이윤혜는 관노로 거제도에, 부인 정란주 역시 노비로 제주도로 각각 부처 되었다. 어린 아들 경한은 나이가 어려 추자도에 귀양 보내지니 실로 황사영은 신앙 그 하나로 이 세상에서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다 바친 순교자가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결안문과 함께 문서고에 버려져 어쩌면 역사 속에서 망실될 뻔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오묘하여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어 묵은 문서를 파기하던 중에 개화관료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건영(요셉)이 이를 입수하여 당시 조선교구장 뮈델 주교에게 전했다. 이렇게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백서는 1925년 로마에서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에 교황청에 헌정되었다. 바로 그 백서가 작성된 지 이백년이 되는 해에 한국을 떠난지 76년 만에 고국에 잠시 보내져 지난 순교성월까지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황사영 백서는 그 서두에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려 울면서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하고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죄인 토마스 등이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라고 끝맺고 있다. 그러니까 황사영 백서의 서명 명의자는 황사영이 아니라 토마스 즉 황심(1756~1801년)인 것이다. 황사영은 왜 그의 백서를 작성하면서 황심의 명의로 올리는 것처럼 했을까! 아마도 황심은 그간 몇 차례 주문모 신부의 밀사로 북경교회를 내왕하였고, 북경에서 영세한 사람이며 북경교회 성직자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에 백서의 신빙성을 더하고 북경교회 성직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서사건으로 뜻을 함께 하며 협조한 순교자들이 적지 않지만 이제 잠깐 백서의 서명 명의자인 황심을 보자. 그는 내포지방의 덕산고을 용머리 사람으로 양반집안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입교 과정이나 신앙생활에 관해서는 주목할 만한 기록은 없으나 한국초대교회사에서 북경을 왕래한 밀사였으며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순교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열심한 신자로서 1799년에 순교한 이보현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그는 위험을 감내하며 북경교회에 파견된 밀사의 역할을 믿음직스럽게 해냈다. 1795년에 그는 교회의 대표로 뽑혀 압록강 국경의 책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맞아 무사히 서울까지 안내하고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왔다. 그리고 1796년 9월에 주신부는 북경주교께 조선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 때 그는 밀사로 뽑혀 부연사행 일행의 하인자리 하나를 사가지고 일행 속에 숨어들어 주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이 쓴 한문편지를 옷 속에 감추고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주신부는 황심의 치밀하고 믿음직스러운 일 솜씨를 보고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3년 동안 계속하여 북경을 왕래하며 세례와 견진성사 때 사용할 성유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는 마침내 백서를 전달하기 위하여 평안도에 살며 말몰이꾼으로 부연사행을 따라 북경을 내왕하던 옥천희를 만나 비밀리에 사신을 따라 연말에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801년 부연사를 따라 북경에 갔던 옥천희가 귀국하다가 조선의 박해 소식을 듣고 다시 만주로 가서 중국교회에 이 사실을 급히 보고하고 귀국하다가 불행히도 국경에서 체포당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황심도 체포당하게 되었다.

황심은 황사영과 그의 동지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천주교인이요 황사영의 백서를 전달하려 한 대역죄인의 판결을 받았다. 결안 받은 대로 1801년 11월 21일 참수되어 육시를 당했을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의 죽음은 비참해 보였으나 그는 위대한 순교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동안 인기리에 연재됐던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과 필자 김길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김길수 교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