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새천년을 여는 특별기획] 20세기의 끝, 21세기의 시작 - 환경 (중) 환경회복 가능한가?

신정식 기자
입력일 2000-10-01 수정일 2000-10-01 발행일 2000-10-01 제 221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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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삶만이 재앙 막을 수 있다 
정화기술·식량개발 등은 단편적 해결책
모든 피조물 공존한다는 의식전환 절실
몇년전 한 사제가 미사강론 중에 『지난 한 주일 동안 라면을 먹었거나 머리 감을 때 샴푸를 쓴 사람은 고해성사를 보세요』라고 한 말이 시중에 회자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신자들의 반응은『에이, 신부님도 참. 라면 먹고 샴푸 썼다고 성사 보라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야?』,『환경 오염이 그렇게도 심각한가?』라면서 한마디씩 거들긴 했지만 결말은「해프닝」으로 치부되고 대부분 웃고 말았다. 하기야 요즘도 라면이나 샴푸 때문에 고해성사를 봐야한다면 성당 다니길 거부하는(?) 어른들의 행태는 물론 경악하는 청소년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21세기 우리 삶의 환경은 막다른 길목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강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이론적이고 통계적인 수치가 아니라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부닥치는 대부분의 환경들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의 극단론자들은 환경재앙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종말이 올것이라 단언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환경오염 위기로 인식못해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담배를 물고 환경오염의 주범을 성토하다가 끝내는 꽁초를 땅바닥에 내치고 만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주변의 일로 치부한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탓에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나와는 무관하게 들려온다. 쓰레기는 쌓여져가지만 내가 버리는 하찮은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 결국은 아직도 「라면이나 샴푸」이야기를 한바탕 웃음으로 넘겨버릴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암울한 환경오염이 개선될 여지는 있는가? 탁해진 공기가, 흐려진 물이 무한정 맑아지고 깨끗해질수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풍족한 음식을 즐기며 대수롭지 않게 찌꺼기를 내다버릴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나빠지는 환경 속에서 병들어가고 숨쉬기 조차 힘들어『헉! 헉!』거리며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는가? 슬프게도 많은 환경 학자들이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개발을 빌미로 산천은 계속 파헤쳐지고 대기와 물의 오염 수치는 계속 높아만지고 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는 오존구멍이 커져가고 지구의 사막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인구는 60억을 넘어서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는 반면 곡물의 생산은 줄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 본위의 첨단을 지향하고, 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류의 본성상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은 가속되리라는 전망이다. 물론 오염을 정화시키는 기술이 개발되고, 일시적이나마 식량이 늘어나는가 하면, 대체 에너지나 식량 개발 노력, 유전자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수명의 연장 등등 장밋빛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단편적인 희망사항일뿐 총체적인 환경문제의 해결책으로는 부각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활양식 반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 1월 1일자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를 통해 『현대사회는 자체의 생활양식을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는 한 생태계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길이 없다. …단순과 절제, 규율과 희생정신이 인간생활의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보다 앞선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메시지「세계안의 정의」에서는『부유해진 나라들은 대량소비를 억제하고 보다 검소한 생활을 받아 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사치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물론 가능한 기술개발로 부분적인 치유를 위해 노력도 해야겠지만 우선 내 자신이 오염원이 되지않도록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즉 절제된 삶으로 소비적 삶을 극복하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하느님의 창조물)과 공존한다는 의식전환이 절실하다. 이렇듯 종교적인 영성과 윤리기준만이 환경을 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절제가 힘들다고 생각되면 「새로운 사치」를 누려보자는 대안도 나오고 있다.『과거에는 사치라고 하면 물질적인 풍요를 떠올렸지만 우리 시대의 사치는 물질적 풍요를 얻기위해 잃어버렸던, 아니 파괴했던 휴식과 여가, 게으름, 느림, 환경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 사치를 누리려면 소비를 절제할 수밖에 없고…』「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오 5, 3)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새삼 의미있게 다가오는 때이다.

신정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