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서양자 수녀의 중국 가톨릭 교회사] (33) 경자(庚子)교난 前의 교난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입력일 1999-08-01 수정일 1999-08-01 발행일 1999-08-01 제 216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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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녀부터 선교사 가는 곳마다 배격
神父인형 만들어 삶거나 찌르며 저주
복주 교난

산동성은 공자의 탄생지이며 예교(禮敎)의 근원지이기도하므로 사실 외래 종교가 발을 붙이기 힘든 곳이다. 거야 교난 후 산동성 사람들은 천주교를 더 구시(仇視.원수로 여김)하였다.

1898년 산동성 복주 남쪽으로 70여리 떨어진 상당리(桑堂里) 최루촌(崔褸村)에 질씨 성을 가진 노인이 있었는데 별명이 홍모오(紅毛五)였다. 질씨 노인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는데 생활은 시골에서 중류 정도 되므로 교우들이 가서 성당 하나를 지어 천주교에 기증하라고 권하여 노인은 교우가 아니었는데 초가 삼간 성당 하나를 지어 교회에 기증하였다.

교우들이 삼간 짜리라도 벽돌로 짓고 기와를 얹어야 한다고 하자 노인은 화가나서 머리로 교우들을 받았는데 교우들이 피하자 담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였다. 교우들이 체포되고 인근 주민들이 분개하여 반양교투쟁을 벌였다. 독일 신부가 관청에 가서 교우들이 억울하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여 교우들이 석방되었다. 주민들이 몰려와 성당을 삽시간에 기와 한장 온전한 것없이 완전히 파괴하였다. 당시 산동은 독일의 세력 범위에 있었으므로 독일 선교사가 세운 교회까지 구시하였다.

민중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밀가루와 물을 조금씩 거두어 밀가루 반죽을 하여 인형을 만들어 독일인이라 하고 십자로 입구에서 가마 솥에 물을 붓고 끓이면서 밀가루로 만든 인형을 솥에 넣고 주문을 외우기를 좬천가면(千家面) 백가수(白家水) 서양인들을 죽게 해달라좭고 저주하였다. 또 풀로 인형을 만들어 나무에 묶어 놓고 독일 신부의 이름을 적어놓고 자정에 바늘로 인형의 눈을 찌르고 칼로 심장 부위를 찌르며 저주하였다.

이원둔 교난

관현(冠縣)의 이원둔(梨園屯) 주민들이 돈을 모금하여 38무(畝)의 땅을 사서 옥황묘(玉皇廟겧寬=탑?를 지었는데 병화로 파괴되었다. 이원둔에 주민이 300여호 되었는데 그 중에 교우가 20여호 되었다. 옥황묘 땅을 분배하여 교우들에게 3무의 땅이 반환되자 교우들이 그 땅을 성당에 헌납하였다. 옥황묘 땅에 성당을 건립하였으므로 주민들의 반발은 대단하였다.

1881년 5월 9일 이 촌에서 옥황신회(玉皇神會)를 하였는데 여기 참석했던 사람들이 성당으로 들어가 싸움이 벌어졌다. 교회와 주민들간에 9년간 투쟁을 해 왔는데 1898년 관청에서 성당 옆에 옥황묘를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98년 10월 24일 조삼외가 군중을 규합하여 좥조청멸양(助淸滅洋) 슬로건을 내걸고 성당을 파괴하였다. 관현의 이원둔 교난은 의화단 봉기의 서막을 열었다.

담성 교난

담성에 소속된 신산(神山)은 그다지 크지않은 마을이었다. 신산의 교우 왕방개(王方凱)가 부호 양청현(楊淸賢)을 협박하여 재산을 착취하였다. 양청현이 관에 고발을 하였는데 관에서는 서양인이 두려워 재산을 찾아주기는 커녕 교우 편을 들어 양청현에게 상해죄를 씌워 처벌하였다. 1899년 양청현은 1만명의 군중을 모아 신산성당을 파괴하고 성당에 있던 양곡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서양사람과 관련이 있는 지주의 주택 232개를 파괴하고 7명을 살해하였다. 당시 이런 몰지각한 교우도 있었지만 성경 말씀 그대로 사는 매우 순박하고 선량한 교우들도 많이 있었다.

아편전쟁 전에는 서양신부가 금지령을 위반하고 마카오 부근에서 중국 내지에 잠입하여 멀리 섬서성 사천성에서 선교하기도 하였으며 선교사들은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되는 일은 있어도 중국 민중들로 부터 대중적으로 박해 받지는 않았다.

1860년부터 선교사가 이르는 곳에는 반드시 그리스도교 배격운동이 일어나고 끝내는 의화단 운동으로 까지 발전하여 세계를 진동시켰다. 반양교투쟁에 농민, 기타 노동 군중, 일부의 지주, 관신(官紳)이 참여하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서양 자본주의가 신속히 발전하였으며 원료 산지와 상품시장 탈취를 위해 서양 열강들은 대포를 사용하였다. 프랑스의 월남 침략과 중불전쟁 후 중국에서 반양교투쟁이 더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이 세운 성당에 크게 타격을 주었다. 중국 전성(全省)에서 일어난 구교운동은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중국 침략 그리고 선교 자체의 역할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

서양자 수녀(한국 순교복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