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경계를 넘어 함께 걷는 사람들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입력일 2024-03-12 수정일 2024-03-12 발행일 2024-03-17 제 338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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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초 접경지역 파주와 연천의 강둑과 들판, 산길과 도로변을 ‘생명평화순례’가 새겨진 녹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걸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사와 불교 스님, 원불교 교무가 함께하는 ‘2024년 DMZ 생명평화순례’는 2월 29일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했다. 4대 종단 20여 명이 유동적으로 참가해 400km를 걸어 3월 21일 동해안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 마친다. 전 구간을 다 걷는 사람도 여럿이다.

순례 이틀째인 3·1절에는 임진각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타종과 순례 선언문 낭독 등의 행사도 했다. 이주 노동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평화누리길’을 걸었다.

장파리공소까지 가서 밤을 지낸 순례단은 셋째 날 연천의 백학공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이날 저녁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는 초대를 받은 나는 ‘이음새’ 이사를 맡은 목사 세 분과 함께 가 순례단에 합세했다. 아침 기온이 영하 10℃였지만 오후에는 조금 풀렸다. 걷는 분들 가운데 아는 얼굴도 여럿 보였다. 접경지대를 4대 종단이 함께 기도하며 걷는 것은 처음이라 더 뜻깊다.

총무 역할을 하며 길 안내를 맡은 성공회의 김현호 신부는 “하루 종일 같이 걷고 식사도 함께 하니 옆에서 코 고는 소리조차 정겹다”고 했다. 10년 전부터 철원 접경지대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본인 잇코 스님도 네팔에서 수행 중인 젊은 스님과 함께 전 구간을 걷고 있다.

날이 추워 빨리 걸은 까닭에 예정보다 두 시간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백학공소에서 일행은 떼제의 노래를 배우고 바로 기도를 시작했다. 교파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소리가 우렁차고 아름다웠다. 한국어로 독서를 하고 일본어로도 한 대목 읽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 (미가 4,3-4 참조 공동번역)

기도 한복판에 자리한 긴 침묵의 시간은 종교인들을 더욱 하나로 모아주었다. 우리는 한반도뿐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미얀마, 남수단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화해의 기운이 사라진 지금, 이 순례는 평화의 불씨를 되살려 보려는 종교인들의 기도 수행이다.

“종교가 없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참석자는 “대립과 분열의 시대에 4대 종단이 어울려 순례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며 "돌아가면 주위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경계를 넘어 함께 걷는 모습이 그에게는 어떤 설교나 설법보다 더 와 닿았던 것이다.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