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만난 사람/ 의정부 법원리본당 88세 반주자 손금남씨

염지유 기자
입력일 2023-07-18 수정일 2023-07-18 발행일 2023-07-23 제 3353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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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손이 빚어낸 선율로 하느님 찬미
75세에 제대로 배운 피아노
14년째 미사 반주 봉사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앙 따라
봉사와 나누는 삶이 행복 비결

손금남씨는 “자손들이 늘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고, 하느님을 믿고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으며, 각자의 능력과 재물을 주님께 기쁘게 봉헌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 주님, 오늘도 제 손가락 잘 움직여 주세요!

“몸은 매일 늙고 약해지는데 마음은 나날이 새로워져요.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말로 다 표현을 못해요. 제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이 행복을 제 자식과 손자손녀들도 맛보고 살면 좋겠습니다.”

의정부 법원리본당(주임 안종찬 나보르 신부) 미사에 참례한 신자 20여 명은 소성당을 가득 메우는 풍성한 오르간 소리에 맞춰 성가를 불렀다.

반주자 손금남(88·베네딕타)씨의 몸은 너무도 작았지만 그가 퍼뜨리는 선율에는 힘이 있었다. 본당에서 14년째 평일미사 반주를 하고 있는 손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그날의 성가곡을 연습하며 하루를 연다.

“주님, 오늘도 제 손가락 잘 움직여 주세요!”라는 명랑한 기도와 함께 매일 성당 가는 마을버스에 몸을 싣는다.

■ 노인대학 반주에서 평일미사 반주까지

그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것은 75살 때였다. 본당 노인대학장을 맡으며 학생들과 성가를 부르고 싶어서 반주에 도전했다.

20대 때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계이름을 익힌 것이 그가 아는 전부였다. “나이가 많다고 주임신부님이 못하게 했는데, 꿋꿋하게 학원을 다녔어요. 돗자리에 건반을 그려서 매일 새벽 2시까지 맹연습을 했지요.”

손씨의 반주에 맞춰 노인대학 학생들이 신나게 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주임신부는 그의 열정을 높이 사며 평일미사 반주까지 허락했다. 처음에는 많이 서툴렀지만 신자들은 항상 “형님, 절대 반주 그만두면 안 된다”며 손씨를 격려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남편도 늘 “하느님은 마음을 보신다”며 용기를 줬다.

그는 “이 나이까지 지혜를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하느님은 제 몫을 남겨 놓으시고 부족한 저를 계속 써주신다”며 눈물을 흘렸다.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손금남씨.

■ 천주님 일에 가장 큰 정성을 쏟으라!

노쇠한 몸으로도 온 힘을 다해 봉사하는 손씨는 부모가 걸었던 신앙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걷고 있다. 경상북도 점촌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십리길을 걸어 공평공소로 새벽미사를 다녔다. 아버지는 점촌동본당에서 20년 동안 사목회장을 맡을 만큼 신심이 깊었다. 손씨는 “일제 때 순사들이 들이닥치면 십자가를 항아리에 숨겨서 땅 속에 묻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부모는 “자나깨나 기도해라, 천주님 일에 가장 큰 정성을 쏟으라”고 가르쳤다.

손씨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믿음으로 인내했고 힘들수록 하느님께 더 바짝 다가섰다. 손씨와 남편이 매일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 넷도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손씨의 아들은 미국 LA 백삼위한인본당 사목회장을 지냈고, 손녀들 중 둘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뿌리 깊은 신앙은 4대째 열매를 맺었다.

요즘 손씨는 후임 반주자를 기다리고 있다. 점점 눈이 나빠져 스탠드를 켜지 않으면 음표가 아예 보이지 않기 때문. 그럼에도 그는 “성가가 있어야 전례가 더 풍요로워진다”며 “후임을 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또 “사는 날까지 하느님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 하느님께 좋은 소리 올라가야… 오르간 기증도

손씨는 얼마 전 새 오르간을 사서 본당에 기증했다. 그는 “하느님께는 좋은 소리가 올라가야 하는데 원래 있던 오르간은 너무 낡아서 마음이 쓰였다”고 설명했다.

밥풀 하나 버리지 않고 아끼고 모으며 살았다는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에 필요한 것을 봉헌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고 나누는 제 모습이 자식들과 손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어요.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내 재능과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면 절로 웃음이 나고 환희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이것이 제가 부모님께 배운 것이자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고의 행복 비법이니까요.”

염지유 기자 gu@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