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성모님의 손(4) / 한경옥

한경옥 마르가리타(시인)
입력일 2022-09-21 수정일 2022-09-21 발행일 2022-09-25 제 331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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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주일미사에만 간신히 참례하는 신자였다. 원장수녀님께서 성가대를 권하실 때는 심한 음치라고, 또 운전하는 것을 아시고 봉성체 봉사를 부탁하실 때는 남편의 일을 도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교중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젊은 수녀님이 다가오시더니 등나무 아래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만 사달라며 앞장서 가시는 거다. 만약 커피를 같이 마시자고 하셨으면 거절했겠지만 커피를 사달라는 말씀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내가 동전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자 수녀님이 그냥 벤치에 앉자고 손을 잡으신다. 그리고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을 맡고 있는데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내게 도움을 청하신다. 그 부탁이 너무 간곡한 데다 어떤 신비스런 힘조차 느껴져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수녀님에게 커피 한 잔으로 낚여서 졸지에 노인대학 일을 맡게 되었다.(수녀님이 노인대학 수강생들에게 나를 ‘커피 한 잔으로 낚은 자매님’이라고 소개하셨다.)

내가 맡은 일은 일주일에 하루, 노인대학에서 동화구연이나 시 낭독, 색종이 접기, 마스게임의 율동 등을 노인들께 가르쳐드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시작한 일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정이 들면서 책임감이 생기고 즐거워졌다. 또한 마음속으로 신성시 되던 수녀님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수녀님께 종교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배울 수 있어 나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는 나날이었다.

처음에는 동화구연이나 시 낭독을 배운 적이 없어 잔뜩 경직된 채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런데도 수녀님은 ‘목소리와 발음이 워낙 좋다’, ‘감정표현이 아주 자연스럽다’ 등의 말씀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또한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가 들려준 동화가 너무 실감나고 재미있었다며 보내주는 응원도 큰 힘이 됐다. 그럴수록 더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연습을 더 많이 했다.

다행히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도 내 수업을 흥미롭게 따라와 주시고 늘 ‘예쁜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셨다. 수녀님도 나중에 동화구연가나 시 낭송가로 활동해도 되겠다고 띄워주시기까지 했다. 어느 날인가는 할머니 한 분이 내 손을 잡으시며 당신의 생신 날, 식사자리에서 내게 배운 대로 동화구연과 시 낭독을 해서 가족들에게 ‘엄지 척!’을 받았다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두 학기를 마치고 임기가 끝난 수녀님이 다른 성당으로 가신데다 나도 이사를 하는 바람에 즐거웠던 일을 그만두게 됐다.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그 다음 해에 한국동화구연협회에서 주최한 전국동화구연대회에 나가 금상을 받고 동화구연가로 활동했다. 또한 시를 가까이 하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도 갖게 됐다. 시 창작에 몰두한 결과, 2013년 5월에 시 전문 월간지 「유심」을 통해 등단해 나는 시인이 되었다. 드디어 2020년 11월에 첫 시집 「말에도 꽃이 핀다면」을 출간하여 명실공히 꿈을 이루었고 2022년 봄에는 ‘제25회 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수녀님과의 만남, 그리고 노인대학에서의 봉사야말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경옥 마르가리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