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청년의 날 르포] 청년 장애인의 평범한 삶 이끌어주는 ‘제주 일배움터’를 가다

염지유 기자
입력일 2023-09-05 수정일 2023-09-05 발행일 2023-09-10 제 3359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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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고 월급 받는 ‘소중한’ 일상… 장애인도 누릴 수 있습니다”
장애인 직업 교육 위해 2005년 설립
지적·자폐성 장애 청년 47명 근무 중
카페·도자기공방·원예 ‘전문가’로 교육

꽃농장에서 일하는 청년장애인들이 화분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9월 16일은 청년 문제에 관심을 높이고 이들의 삶을 응원하는 ‘청년의 날’이다. 수많은 청년이 취업난을 겪고 있지만, 특히 청년 장애인들은 높은 취업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사회복지법인 제주황새왓카리타스(대표이사 김형민 베드로 신부) 산하 ‘일배움터’(원장 오영순 정혜엘리사벳)는 청년 장애인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2005년 설립된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이자 사회적 기업이다. 일배움터에서 청년 장애인들이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가꿔가고 있는지 찾아가 봤다.

남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일배움터에 들어가자마자 ‘남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청년 장애인들이 평범한 삶을 꾸리도록 돕겠다는 일배움터의 다짐이 담긴 슬로건이었다.

첫 번째로 방문한 플로베공방은 불량 원두를 손수 골라내는 핸드픽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청년은 커피콩을 일렬로 줄 세우며 느릿느릿 작업했고, 또 다른 이는 빠른 손놀림으로 원두를 뒤적이며 불량콩을 골라냈다. 청년들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각자의 방식, 각자의 속도로 일했다.

일배움터에서 일하는 청년 47명은 모두 지적 장애 혹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이다. 1~3년간 교육생 신분으로 바리스타·도자기 공예·원예 일을 체험한 후, 적성에 맞는 사업장에 고용된 직원들이기도 하다.

플로베공방에서는 유기농 생두를 직접 로스팅해서 만든 커피 가공품을 제작한다. 청년들은 발달장애인 맞춤 로스터기를 이용해 원두를 볶고, 제품을 판매용으로 포장하는 일까지 책임지고 있다. 윤준혁(31)씨는 여러 원두를 섞어 새로운 커피를 만드는 블렌딩을 위해 원두 무게를 몇 번이고 조정했다. “10g도 틀리면 안돼요. 그러면 커피 맛이 바뀌어요.” 그의 말에서 일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최근 바리스타 2급 자격증을 취득한 고상수(토마스·26) 교육생도 “커피를 내리고 원두를 구분하는 일은 매일 해도 즐겁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처음에는 낯선 일을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차근차근 찾아가며 맡은 일에 애정을 품게 된다. 일배움터는 청년들이 조금 느려도 기다려주며 각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감정을 조절하며 타인과 협동할 수 있도록 훈련도 꾸준히 시행한다. 청년 장애인들이 사회성을 가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일배움터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일배움터 원예실 청년장애인이 직접 가꾼 화분을 들어보이고 있다.

일배움터 도자기공방 청년장애인이 직접 만든 도자기 그릇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장애인이 아니라 장인입니다

일배움터 온실정원은 도자기공방과 원예실로 나뉘어 있다. 손재주가 좋은 청년 장애인들이 만든 각양각색의 도자기가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선생님! 이거 내가 구웠어요!” 한 청년이 기자를 향해 도자기 그릇을 가득 들어보이며 자랑했다.

발달장애인 중에는 관심 분야에 높은 집중력을 보이며 꼼꼼한 이들이 있다. 홍은실(나탈리아) 강사는 “도자기를 빚고 가마에 굽기까지 2주가 넘게 걸리지만 인내하는 청년들 모습이 기특하고, 이들이 정교한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원예실에는 정성으로 화분을 가꾸고, 꽃다발을 만드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원예실 청년들은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화분과 화환, 꽃다발과 꽃바구니를 예쁘게 만들어 판매한다.

온실을 빠져나가면 넓은 다육이농장과 꽃농장이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청년들은 땀을 흘리며 일일초를 심고 있었다. 도청에 납품할 길거리꽃을 재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이 가장 재밌느냐고 묻자 이경관(아우구스티노·33)씨는 “식재 나가는 일이 제일 재밌다”며 “우리가 예쁘게 키운 꽃을 길 위에 심으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으니까 행복하다”고 말했다. 경관씨의 말에 또 다른 청년이 “우리랑 같이하니까 더 재밌는 거지!”라고 외쳤다. 청년들은 서로 동료애를 느끼고, 직접 땀 흘려 일하는 일상 속에서 보람을 얻고 있었다.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중에 원예 사업을 하는 곳은 일배움터가 유일하다. 원예는 생명을 다루는 일로, 직접 심은 모종이 조금씩 자라는 것을 보는 일은 청년 장애인들의 정서 안정과 치유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일배움터의 비장애인 직원들은 “청년 장애인들의 노동은 가정의 평화와도 직결된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일에 집중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다 보니 부모와 형제가 감정소모할 일이 크게 줄어든다. 잦은 분노 표출과 돌발 행동으로 가족을 지치게 했던 청년이 일배움터에서 원예 일을 시작한 뒤 집안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사례도 적지 않다.

일배움터의 청년 장애인들은 원예 일을 통해 사회 공헌 활동도 하고 있다. ‘플로베를 배달하는 청년들’이라는 동아리를 꾸려 매달 제주 4.3 사건 생존자 30여 명에게 반려식물을 전하고, 환경보호를 위해 폐화분이나 일회용 컵을 가져오면 반려식물을 심어주는 행사도 매년 진행한다.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일상

일배움터의 청년 장애인 중 17명은 ‘플로베 카페’에서 일한다. 플로베는 제주도 최초 장애인 바리스타 카페로 현재 일배움터에서 3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플로베SK점 바리스타 청년들은 손님들에게 밝게 인사하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줬다. 음료 제조를 끝낼 때마다 정리정돈도 척척이었다. 플로베는 ‘플라워’와 ‘러브’의 합성어다. 꽃향기가 피어나는 사랑스러운 정원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커피뿐 아니라 향기로운 꽃도 함께 파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유기농 원두는 물론이고, 음료를 담는 도자기컵, 판매용 화분과 꽃다발까지 모두 일배움터 청년들의 손끝에서 탄생해 더 특별했다.

카페에서 12년째 일하고 있다는 강승호(33)씨는 수준급 라떼아트 실력을 보여줬다. 예쁜 하트 모양에 감탄하자 다른 모양도 만들 수 있다며 흐뭇해했다. 그는 “월급을 받으면 저축도 하고, 부모님 선물이나 평소에 사고 싶던 물건을 산다”며 “최고로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가 돼 오래도록 이곳에 남고 싶다”고 했다.

일배움터는 모든 사업장의 수익금을 청년 장애인들의 월급, 직업훈련비로만 사용한다. 오영순 원장은 “우리의 목적은 수익이 아니라 고용”이라며 “청년들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게 해서 당당하고 행복한 직장인으로 사는 삶을 누리게 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앞으로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쓰고, 청년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출근이 즐거운 일터’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출근할 회사가 있고, 함께 의지할 동료가 있다는 것은 청년 장애인들에게 평범하게 사는 삶을 넘어 더 큰 꿈을 꾸게 한다. 일배움터 청년 장애인들은 ‘남들만큼 행복하게’, ‘남들만큼 뿌듯하게’ 그렇게 세상 속에 녹아드는 삶을 꿈꾸고 있다.

제주 플로베SK점에서 일하는 청년장애인이 플로베 도자기컵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시 화북이동에 위치한 ‘일배움터’ 전경.

염지유 기자 gu@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