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선교사들의 휴가지: 손골성지와 하우현성당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3-07-18 수정일 2023-07-18 발행일 2023-07-23 제 335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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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피해 쉬면서 몸과 마음 재충전… 선교할 힘 되찾았던 장소

손골성지 전경. 다블뤼 신부는 휴양차 이곳을 방문해 신자들과 나무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바람을 쐬고, 참외나 옥수수를 먹으며 여름을 보냈다고 한다.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이들이 휴가를 떠난다. 더위를 피해, 일상을 떠나 즐기는 휴가는 지친 삶에 활력을 주곤 한다. 박해시기, 그리고 박해 이후로도 우리나라를 찾아 선교하던 사제들은 휴가를 보내며 선교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충전하곤 했다. 그렇게 선교사들이 휴가를 보내던 곳들이 교구에도 있다. 바로 손골성지와 하우현성당이다.

■ 손골성지

병중의 다블뤼 신부 휴양하며

계곡물 발 담그고 바람 쐬던 곳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손골성지. 성지를 가로지르는 계곡물이 듣기만 해도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손골성지는 박해시대에 여러 선교사들이 휴가를 보낸 곳이다.

“조만간 저는 사목방문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번 사목방문은 아주 편안하고 별로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사 자료에서 ‘손골’을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후에 제5대 조선대목구장이 되는 다블뤼 신부가 1853년 9월 18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다. 1850년 페레올 주교는 당시 병중에 있던 다블뤼 신부에게 사목방문을 일시 중지하고 신학생들을 교육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블뤼 신부가 곧 사목방문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밝힌 장소가 바로 손골이다. 다블뤼 신부가 병중 줄곧 손골에만 머물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편지를 볼 때 적어도 1853년 여름은 손골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박해시기라고 하면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라고만 여길 수도 있지만, 다블뤼 신부가 묘사한 손골의 여름은 편안하고 정감 가는 여름휴가의 풍경이었다. 편지에서 다블뤼 신부는 “아주 즐겁게 여름을 보냈다”고 밝히면서 신자들과 나무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바람을 쐬거나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피한 일, 참외나 옥수수를 먹고 노래자랑을 하며 여름을 보내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손골성지 성당.

손골성지 십자가의 길.

신심 깊은 신자들이 모인 손골 교우촌은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마음 놓고 머물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손골은 이후 선교사들이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장소가 됐다. 페롱·조안노·칼레·오메트르·도리 신부 등이 이곳에 머물면서 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선교활동을 준비했다.

그동안에도 손골은 휴양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페롱 신부가 있었던 1857년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찾아와 함께 지내다 갔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있었던 1861년 8월에는 베르뇌 주교와 랑드르 신부가 손골을 방문해 함께 휴식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우현성당 사제관.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돼 지금도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하우현성당

서울과 가깝고 경치가 좋아

박해 끝난 뒤 휴양지로 각광

손골성지가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휴양지였다면,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인기 있었던 휴양지는 하우현성당이다. 경기도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에 자리한 하우현성당도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들이 이룬 교우촌이었다.

하우현성당은 손골과도 연관이 깊다. 친구 사이였던 손골에 머물던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하우현 인근에 머물던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서로 찾아가곤 했다. 두 신부는 만나면 함께 노래도 부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피정하며 휴식 시간을 보내곤 했다. 손골 만큼은 아니지만 하우현도 박해시대부터 선교사들이 휴가를 보낸 장소였던 셈이다.

하우현 역시 신심 깊은 신자들이 많이 살던 교우촌으로, 복자 한덕운(토마스)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이 이곳 출신이다. 1866년 순교한 볼리외 신부도 이 지역에서 사목하다 체포돼 순교했다. 이 박해들로 하우현 지역 교우촌은 거의 와해됐다가, 1884년에야 다시 신자들이 모여 공소가 설립됐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100여 년을 이어온 박해가 끝나면서 하우현은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명성을 얻었다.

하우현성당.

하우현성당 묵주기도의 길과 성모상.

왕림본당 2대 주임이었던 알릭스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성당 없이 신자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1894년 5월 초가 목조 양식의 공소 건물을 신축했다. 이후 하우현 지역 교세가 급속도로 증가했고, 하우현이 알려지면서 선교사들이 휴양하러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서울과 가까워 방문하기 좋은데다 경치가 좋아 휴가를 보내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하우현에 머물면서 조선의 말과 문화를 배웠고, 또 며칠씩 하우현에 체류하면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하우현은 1900년 본당으로 승격됐지만, 사제 부임이 이뤄지지 않아 공소가 됐다 본당이 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성당과 초대 주임 샤플랭 신부가 건축한 사제관은 유지돼 사제들의 휴양지로 이용됐다. 특히 한불절충양식으로 건축돼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된 사제관은 지금도 보존돼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손골에서도 하우현에서도 선교사들이 휴가를 보낸 기록을 살피면 빠지지 않았던 활동이 있다. 바로 기도다. 선교사들은 휴가를 보내며 선교활동 중 잠시 휴식을 취했지만, 하느님을 잊지 않고 신자들을 잊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휴가는 박해나 선교라는 무거운 사명을 벗어던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면서 다시 박해 중의 신자들을, 선교가 필요한 지역을 찾아다닐 힘을 얻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번 휴가기간 잠시나마 선교사들의 휴양지를 찾으며, 육(肉)만의 휴가가 아니라 영육(靈肉)이 함께 충전되는 휴가로 삼아보면 어떨까.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