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혼을 여는 문 ‘이콘’] 이집트의 성 메나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rn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입력일 2017-06-13 수정일 2017-06-13 발행일 2017-06-18 제 3049호 1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그리스도와 수도원장 메나.

성 메나는 메나스(Menas)로도 불린다. 285년 이집트 멤피스 근처 니세우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유피미아는 자식이 생기지 않자 성모 이콘 앞에서 아들을 주시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이콘으로부터 ‘아멘’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메나를 낳았다.

메나는 15살에 로마군대에 입대해 프리지아에서 복무하고, 3년 후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기를 서원하며 사막으로 나갔다. 이후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코티에움에서 체포돼 고문당한 후 목이 잘려 순교했다.

메나를 처형한 병사들은 3일 동안 그의 시신을 불태웠지만 그의 시신은 조금도 타지 않았다. 그 후 메나의 여동생은 군인을 매수해 그 시신을 배에 싣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모셔 두었다.

박해가 끝났을 때, 천사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총대주교에게 나타나 성 메나의 시신을 낙타에 실어 리비아 사막으로 나가라고 했다. 사막으로 나가 마리아트 호수 끝 어느 지점에 이르자 성인을 실은 낙타가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느님의 표시로 생각해 그곳에 성 메나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로마 총독이 성 메나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성인의 관을 실은 낙타는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았다. 관을 다른 낙타로 옮겼지만 두 번째 낙타도 움직이지 않았다. 총독은 마침내 이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세월이 지나 성인의 시신의 위치는 잊혀졌다.

5세기 초반, 비잔틴 황제 제노(474~491)에게는 나환자 딸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소녀에게 성 메나가 나타나 자신의 시체가 묻힌 곳을 알려 주었다. 다음날 그녀는 완치됐고, 자신이 전날 본 환시를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노 황제는 즉시 성 메나의 시신을 찾고 리비아 사막의 국경 지대에 대성당을 짓도록 했다. 이후 그곳은 카룸 아부 미나라는 큰 도시로 발전했으며, 다양한 질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그는 동방정교회와 콥트정교회는 물론 로마가톨릭에서도 모두 공경 받고 있다.

이번에 소개한 이콘은 6세기 말 어느 무명의 이집트 장인이 그린 ‘그리스도와 수도원장 메나’란 성화다. 오른쪽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는 후광과 십자가가 보인다.

그는 복음서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다정한 친구처럼 수도원장 메나(AD 285~309년경)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그리스도 후광 오른쪽에는 ‘구세주’(Savior)란 명문이 있으며, 성 메나의 후광 왼쪽에는 ‘수도원장 메나’(Apa Mena Superio)라는 명문이 있다.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rn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