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김원 건축가

최용택
입력일 2024-04-29 수정일 2024-04-30 발행일 2024-05-05 제 339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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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축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높아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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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순교미술관

어쩌다 시작한 건축, 평생을 건축가로

어릴 적 꿈은 건축가가 아니라 조각가였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조각을 많이 했고, 미술대학으로 진학하려 했죠. 그런데 집에서 반대를 했어요. 미술가는 배고프다고요.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건축이었어요. 제일 배가 안 고플 게 확실한 게 공과대학이었고, 나름 절충을 한다고 한 게 건축이었죠. 건축가는 어쩌다 우연히 됐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도 조각처럼 건축도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죠. 지금 60년째 건축일을 하고 있는데, 절대 지루하지 않고 질리지 않는 것이 건축의 매력인 것 같아요. 아침마다 ‘빨리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에요. 할 일이 항상 쌓여 있고, 그 일을 할 생각으로 흥분돼요. 건축이라는 일이 다채로워요. 선택 하나하나에 따라 결과가 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물론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기도 하죠. 지금 생각하면 그동안 참 재미있게 살아왔다고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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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톨릭대학교 성당

하늘의 별이 된 누이의 바람

고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께서 6·25전쟁 중 돌아가시고 나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어요.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는데, 어머니께서 먼저 세례를 받으셨어요. 저는 대학 4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양산성당에서 영문도 모른 채 세례를 받았어요. 근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여동생은 내가 건축학과에 들어간 후 ‘오빠가 성당을 지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했데요. 나중에 수녀가 돼서 유럽에 가서도 어마어마한 성당을 보면 카드를 사서 보냈어요. ‘오빠가 이런 설계를 하길 바라’라고 써서요.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죠. 여동생은 수녀가 된 후 독일에서 의사 공부한 후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그만 암에 걸렸어요. 귀국해서 몇 달 못 버티다 주님 곁으로 갔어죠. 

당시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명동대성당 옆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제 동생의 장례를 부탁했어요. 거기 수녀님들이 제 동생의 장례를 정말 잘 치러주셨어요. 그리고 장례미사는 함세웅 신부님(아우구스티노,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이 주례하셨어요. 장례미사 강론이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기억해요.

동생을 보내고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함 신부님이 전화하셨어요. 만나자고 해서 기쁘게 달려갔는데, 성당을 지어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1979년 처음으로 성당을 짓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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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순교성지 기념탑과 경당

‘좋은 뜻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

당시 함 신부님은 한강성당 주임으로 계셨는데, 당시 한강성당은 상가건물에 세를 들어 있었어요.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열심히 하시던 신부님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살던 동부이촌동에 있는 본당으로 가셨으니, 신자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함 신부님은 새 성당을 짓는 것으로 신자들의 반감을 돌파하려 하셨어요. 신자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성당도 없이 상가를 빌려 형식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슨 사명감으로 신부를 반대하느냐는 거였죠. ‘성당부터 하나 똑바로 지어놓고 이야기하라’고요. 성당을 지으려니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던 제가 생각이 나셨던 거죠.

본당 상황을 보니, 폼 나는 고딕 스타일, 하늘을 찌르는 뭐 이런 걸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신자들의 반대가 심하니 건축 기금 모으는 것도 큰 일이었어요. 그래서 성당을 짓는데 제일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덜 들이는가였어요. 

그런데, 보면 이런 나쁜 조건에서 항상 좋은 해결책이 나오더라고요. 우선 파벽돌을 썼어요. 당시 영등포에 있던 조선맥주 공장을 새로 짓고 있었는데, 기존 건물을 철거하며 나온 파벽돌을 운송비만 내고 가져다 썼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자원 재활용인거죠. 새 벽돌값의 1/4 가격에 벽돌을 구할 수 있었고, 헌 벽돌을 쓰니 번쩍번쩍하는 근사한 건물은 생각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아주 차분하고 오래된 건물 같은 성당을 지을 수 있었어요.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해요. 한강성당으로 1981년 한국건축가협회 상도 받았어요. 그 후 파벽돌 사용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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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검정성당

교회건축과 성미술에 사목자의 관심 필요

한강성당이 잘 지어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명동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원 성당을 지어달라고 의뢰했어요. 당시 성당 벽을 ‘로즈 윈도우’, 바로 장미창으로 만들어서 크게 이슈가 됐어요. 이후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당시는 신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던 때여서 성당을 많이 지었어요. 관련해 성지 개발 프로젝트도 많았고요. 제가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타이밍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교회 관련 건축에 많이 불려 다녀 성당 여러 곳을 짓고 성지 조성에도 많이 참여했어요. 지금은 대한성공회 대전주교좌 성당을 짓고 있어요. 아마도 제 마지막 건물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수많은 성당을 지으며 느낀 아쉬운 점은 사목자들의 성미술과 교회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거예요. 제가 지은 한강성당은 채 10년도 안 되어 없어졌어요. 함 신부님 다음에 부임한 주임 신부님이 새로 성당을 지은 거죠. 신자가 늘어 더 큰 성당이 필요할 수도 있지요. 그래도 기존의 성당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부수는 일은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 아니에요? 

쉽게 부수고 새로 지을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들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워요. 신학생 양성 과정에서부터 교회건축과 성미술에 대한 과목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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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안드레아) 조각가는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5년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바우센트룸 국제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서울 한강성당을 시작으로 수많은 교회뿐만 아니라 독립기념관과 국립국악원, 통일교육원 등 굵직한 건물을 건축했다. 1998년 제3회 가톨릭미술상 본상, 2001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 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