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내가 나를 모르는데 / 이연학 신부

이연학 신부(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원)
입력일 2016-05-17 수정일 2016-05-27 발행일 2016-05-22 제 299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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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반성하게 되는 것이 많다. 아, 장날이면 어김없이 고성읍내 시장통 어딘가에서 고물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뽕짝’ 소리에, 귀는 괴롭고 내심은 같잖았던 젊은 날의 시건방이여. 그런데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뽕짝이건 아니건 저잣거리에 흘러다니는 노래를 들으면 결코 얕지 않은 감동을 받고 더러는 눈시울까지 붉힐 줄 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하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다. 옛날엔, 제목도 그렇고 마지막의 호탕한 웃음도 그렇고, 유행가(流行歌)치고는(!) 좀 과하게 심오해서 어색하다 느꼈던 것 같다. 게다가 첫 구절만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방어적인 나머지 살짝 시니컬한 느낌마저 나지 않는가. “네가 나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알아? 사실은 나도 널 몰라”하는 식으로…. 그런데 요즘 뜬금없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래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곤 한다.

계기가 있었다. 작년 어느 날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아주 오랜만에 들었는데, 첫 마디의 “네가”가 “내가”로 들렸다. 모음 ‘ㅔ’와 ‘ㅐ’를 구분하는 데 대체로 소질이 없는 경상도 사람이라서 그랬으리라. 어쨌든 그 순간 비로소, 노래에서 뭔가 심오한 냄새를 많이 맡았다고 기억한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이 알리.”

‘나를 모르는’ 경우에는, ‘자기난독증’(自己難讀症)에 걸려 이웃은 다 아는 자기 모습을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경우 말고도, 다른 종류가 있다. 기도를 하느님의 현존(現存) 앞에 나도 지금 여기에서 깨어 현존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하느님을 알아가는 여정이지만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거기서 나는, 고대 교부들이라면 ‘하느님과 닮은 모습’(similitudo Dei)이라고, 엑카르트 같은 중세 스승이라면 ‘영혼의 근저’(根底, grund)라고 불렀을 나의 진면목에 대한 감각도 익혀가게 되는 것이다. 이 ‘근저’, 이 ‘나’는 생각으로 알아듣고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안에 담겨 머물 수 있을 따름, 하나되어 있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딱히 말로 표현할 길도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콜로 3,3) 나도 내가 누군지 완전히 모른다고나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자기무지’의 자리에서라야 우리는 남에 대한 가혹한 판정의 습(習)을, 가볍기 이를 데 없어 더 잔인한 저 ‘뒷담화’들을 비로소 멈출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자리에서만 나는 내 존재의 신비에 경탄(驚歎)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러기에 남의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느낄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근저’에서 서로 연결됨을 보는 바로 이 자리에서, 토마스 머튼은 유명한 ‘월넛가 체험’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사람들 마음 속의 비밀스런 아름다움을, 그 깊이를 본 듯했다. 그 어떤 자기인식도 도달할 수 없는 그들의 본래 면목, 그 심장부를 보는 듯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 그들 각자를 보는 듯했다. 있는 그대로의 이 모습을 스스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늘 서로를 이런 식으로 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전쟁도 증오도 잔인함도 탐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나는 우리가 서로 앞에 엎드려 절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죄많은 방관자의 억측」, 1966)

개인이나 집단이나 심한 진영논리에 갇혀 인간관계가 죄다 ‘흡수통일’ 아니면 ‘분단고착’ 둘 중 하나가 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싶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이 알랴. 이 노래만 제대로 부를 줄 알면, 우리는 “서로 앞에 엎드려 절할 줄도 알게” 되리라. 아시겠지만 참고로 덧붙이면, 이 노래의 제목으로 쓰인 산스크리트어 ‘타타타’의 뜻은, 부처님 명호(名號) 중 하나로서 ‘있는 그대로’(眞如)라고.

이연학 신부(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