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우리는 지금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는가? / 황종렬 교수

박지순
입력일 2024-03-15 수정일 2024-03-21 발행일 2024-03-24 제 338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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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 작용은 ‘시냅스’(synapse)를 통해 이뤄진다. 뇌신경세포는 그물처럼 하나로 이어져서 작용하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인접해 가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시냅스는 ‘함께’를 뜻하는 그리스어 ‘syn’과 ‘연결하다’ 혹은 ‘움켜쥐다’를 뜻하는 ‘haptein’이 결합된 말이다. 이것은 정보를 전하는 뉴런과 받는 뉴런이 화학적 작용이나 전기적 작용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부분을 말한다.(매튜 코브 지음, 이한나 역 「뇌과학의 모든 역사」 194~212쪽) 신경세포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떨어져 있는 간격을 ‘시냅스 틈’이라고 한다. 그 간격은 20~50nm(나노미터) 정도다.

시냅스가 떨어져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틈 내지는 간격이 있으므로 사고의 흐름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그냥’ 이뤄지지 않게 된다. 이 정보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산소와 에너지다. 사고와 의식의 흐름을 위해 건강한 식사와 숨쉬기가 필요하다. 생각이 많으면 영양과 산소가 그만큼 많이 필요하므로 맥박이 빨라지고, 너무 허기지거나 호흡이 약해지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켈란젤로(1475~1564)가 16세기 초에 그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에 시냅스 현상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하느님이 하와를 안고 천사들과 함께 아담에게 날아가셔서 밑으로 처져 있는 아담의 손가락에 당신의 손가락을 뻗어 생명의 기운이 전해지게 하시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가 뇌의 신경세포들이 떨어진 상태에서 신호를 전달하고 전달받아서 작용하는 것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은 현대 뇌과학자들도 경탄할 만큼 시냅스 작용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이때 하와를 안고 계신 하느님과 주위에 있는 존재들이 원형 비슷한 형태 안에 그려져 있는데, 이 형태가 뇌를 옆에서 본 것과 유사하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이미 하와를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 신비를 뇌와 연결해 그려낼 만큼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에 대해 깊게 통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통할 때 저렇게 건너야 하는 틈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것부터 먼저 건너게 할까? 경험에 의하면, 친근하고 도움이 되는 것부터 먼저 건너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창조돼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면서도 그분과 ‘저절로’, ‘언제나’, ‘당연히’ 이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들과 이어져서 심지어는 의식과 행동으로 그분 밖에서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에게 익숙하고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선택하고 낯설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기피한다. 하와와 아담은 자기의 욕망에 불을 지른 뱀과 시냅스한다. 그리하여 선악과를 따먹고는 두렁이를 만들어 몸을 가리고 하느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 7-8) 이들이 비록 하느님의 명을 어겼어도 존재로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으로는 하느님 밖에 있고 싶어한 것이고, 그 결과 행동으로 하느님 밖에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시냅스 틈은 인간의 존재 구조다. 이 구조를 모르고는 인간의 선입견과 폭력을 이해하기 어렵다. 도덕적으로 접근해서는 한계가 있다. 이 틈을 있는 대로 보고 이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잇는 것. 무엇과? 하느님과! 이것이 ‘re-ligio’, ‘종교’다.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 안에서 살도록 이어주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우리 교회가 할 거룩한 사명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교회는 지금 존재와 의식과 행동으로 그분 안에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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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