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서 한센인 치료하던 어머니… 사제되기까지 이끌어준 등불
제5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배기현 주교는 소탈하고 겸손한 성품과 재치 있는 유머로 만나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우애’와 ‘의리’가 남다른 배 주교 모습에 선·후배 사제들은 물론 신자들도 존경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배 주교가 있기까지 그 뒤에는 남모를 고통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배 주교는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 자비를 깊이 체험하고,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배 주교 삶의 모습들과 그 안에서 더욱 굳게 다져진 그의 신앙을 따라가 본다.
■ 자유를 넘어선 ‘방종’ 배기현 주교는 1953년 2월 1일 영문학자(셰익스피어 전공)였던 아버지 배덕환(요셉) 선생과 산부인과 의사였던 어머니 전풍자(모니카) 여사 사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생활했다. 자유는 방종으로까지 이어졌고, 고등학교 시절 정학을 네 번이나 받을 만큼 말썽도 많이 피웠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 남달랐던 어머니 전씨는 그런 그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개신교 세례를 받았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교회에 갈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우연히 가 본 성당을 좋다고 하니 같은 하느님이라며 다니도록 허락했다. 형제들이 세례 받을 때 배 주교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막내라는 이유로 교리도 배우지 않고 엉겁결에 세례를 받았다. ■ 탕자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제2의 탄생’ 배 주교의 부모는 큰 부를 쌓을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재산 한 푼 없었다. 늘 수입의 절반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어 놓았고, 급기야 1976년에는 잘 되던 병원을 그만두고 소록도로 이사해, 한센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배 주교는 새로운 삶을 결심하게 됐다. 배 주교에게 소록도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제2의 탄생지인 셈이다. 막연히 신부가 되겠다고 생각한 배 주교는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던지라,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침마다 일어나기는커녕 기도와 미사도 빠지기 일쑤였다. “위의 학생은 1년 남짓한 신학교 생활동안 신앙이라곤 일점일획도 볼 수 없었다.” 당시 신학교에서 교구로 보낸 증언서 내용이다. 결국 1학년 2학기 신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당시 ‘3선 개헌’ 사건으로 귀가 조치가 취해진 덕분에 무사히 2학년에 올라가게 됐다. 배 주교는 남들과 같아지려면 엄청난 고생을 겪어봐야 겨우 ‘중간’은 되겠단 생각으로 군대에 지원해 공수부대로 가게 됐다. 낙하 중 사고로 허리와 무릎을 크게 다쳐 지금까지 크고 작은 수술만 11차례나 받았다. 그럼에도 배 주교는 “드디어 ‘중간’이 되어 돌아왔다”며 기뻐했다고. ■ ‘파적(破寂)대사’로 지낸 신학교 생활 12년 배 주교는 건강 문제로 휴학을 많이 했다. 더 이상 휴학할 수가 없어 자퇴 후 재입학하기까지 했다. 자그마치 12년 동안 신학교 생활을 한 셈. 그는 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내 허리를 밟으신 하느님, 내 입맛을 떨구게 하지 않으시니 찬미 받으소서!” 아플 때마다 욥기를 많이 읽었던 배 주교의 ‘욥기 패러디’ 기도다. 서품동기인 조명래 신부(산청본당 주임)는 “병상에 누워있을 때가 영혼이 살찌는 시기라고, 고통 속에서 오히려 단련된 것 같다”며 “매우 긍정적이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라고 전했다. 신학교 생활을 오래한 만큼 배 주교는 동기나 후배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 역할을 자처했다. 신학생들에게 그는 힘들 때마다 언제든지 찾아가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신학교는 대침묵이 엄격한 곳이지만 그의 방엔 대침묵이 없었다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파적(破寂)대사’였다. 고요함을 깨트린다는 의미다. 배 주교와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온 이연학 신부(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원)는 “배 주교님은 자신의 약함을 정직하게 잘 알고, 그런 허약함을 통해 하느님 자비를 더 깊게 알아가셨다”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주교님도 스스로를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바라봐 주신 죄인’으로 느끼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 어머니와 스승 배 주교에게는 두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하나는 어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인 정달용 신부이다. 어머니 전씨의 깊은 사랑과 신앙은 배 주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가 남겨준 신앙 일기는 그가 이 길을 끝까지 가도록 이끌어준 힘이 되고 있다. 배 주교가 신학교 2학년 때 너무 힘들어 뛰쳐나왔을 때도,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조차도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희망을 걸고 있었다. “깜깜한 밤에 명주실 한 가닥 보는 것 같았지만 하느님께서 비추신다면 혹시 부르실 지도 모른다.” 배 주교는 정달용 신부(대구대교구 원로사목자)에게 철학하는 법을 배웠다. 그에게 정 신부는 단순한 스승 그 이상이다. 교황청대사관에서 순명서약을 마친 후 곧장 대구로 내려가 정 신부를 찾아간 것도 스승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정 신부 덕에 배 주교는 서른여섯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공부 10분 걱정 50분’의 삶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정 신부 덕에 7년간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귀국 후 배 주교는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후배들을 사랑으로 이끌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 모습은 그의 스승 정달용 신부 모습과도 꼭 닮아있다.정정호 기자 piu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