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1일 선종함에 따라 사도좌 공석(Sede vacante)이 된 교회는 추기경단의 주도 아래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교황 선거 ‘콘클라베’는 어떻게 진행될까? ■ 추기경 선거인단 오늘날 콘클라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96년 반포한 교황령 「주님의 양 떼」(Universi Dominici Gregis)에 따라 이뤄진다. 교황령에 따르면 사도좌 공석이 된 시점에 만 80세 미만인 추기경에게 교황 선거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전통적으로 교황 선출권 보유 추기경 수는 120명 이하로 제한돼 임명됐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중 80세 미만 추기경을 이 제한보다 더 임명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4월 21일 기준으로 135명의 추기경이 교황 선출권을 지니게 됐다. 135명의 추기경을 서임한 교황별로 살펴보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5명, 베네딕토 16세가 22명, 프란치스코 교황이 108명이다. 대륙별로는 유럽이 53명, 아시아가 23명, 북아메리카가 20명, 남아메리카가 18명, 아프리카가 18명, 오세아니아가 3명이다. 현재 교황 선출권을 지닌 추기경 전원이 참석하게 되면 역대 최다 인원이 참석한 콘클라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2013년과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된 2005년 콘클라베에서는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이 115명이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1978년 콘클라베에는 111명이 참석했다. 교황 선출권 지닌 추기경 현재 135명 교황청 공식 발표, 5월 7일 콘클라베 시작 5월 중순 새 교황 맞이할 듯 ■ 콘클라베 진행 과정 콘클라베가 개최되면 선거인 추기경들은 교황궁의 바오로 경당에 모여, ‘오소서, 성령님’(Veni Creator) 성가를 부르며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행렬을 지어 시스티나 경당으로 간다. 시스티나 경당에 도착하면 추기경들은 한 명씩 복음서에 손을 얹고 서약문에 따라 맹세한다. 마지막 추기경의 맹세가 끝나고 외부인이 모두 퇴장하고 나면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시스티나 경당은 봉쇄된다. 투표는 ‘나는 교황으로 뽑는다’라는 문구가 쓰인 투표용지 하단에 피선자의 이름을 작성해 반으로 접어 집표함에 넣는 비밀투표 방식으로 이뤄진다. 콘클라베의 비밀누설에는 파문 제재가 따를 정도로 엄격하게 비밀이 지켜진다. 추기경들은 “나를 심판하실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삼아 나는 하느님 앞에서 당선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선거합니다”라고 말하며 집표함 뚜껑 위에 투표용지를 올리고 뚜껑을 뒤집어 투표용지를 집표함에 넣는다. 선거인 추기경단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만약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없으면 다시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 투표를 마친 후에는 투표용지를 태워, 그 연기를 통해 외부에 결과를 알린다.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으면 검은 연기를, 교황이 선출됐으면 흰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래서 신자들은 시스티나 경당 굴뚝이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모여 선한 목자의 탄생을 기도하며 흰 연기가 피워 오르길 고대한다. 콘클라베는 첫 날 한 차례 투표를 진행하고 다음 날부터 오전과 오후 각각 두 차례씩, 하루에 총 네 번까지 투표를 실시한다. 만약 이렇게 사흘 동안 투표가 이뤄졌는데도 의견 합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하루 동안 투표를 중단하고 추기경들은 기도와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이후 일곱 번의 투표 후에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다시 하루 중단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투표 끝에 교황이 뽑히면 선임 추기경이 피선자에게 교황직 수락 동의를 구하고, 피선자가 동의하면 콘클라베는 종료된다. 콘클라베가 종료되면 선거인 추기경들은 새 교황에게 경의와 순종을 표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새 교황과 교황명을 발표하고 새 교황이 ‘로마와 온 세계에’(Urbi et Orbi) 사도적 축복을 내린다. ■ 언제 새 교황을 만날 수 있을까? 교황령 「주님의 양 떼」는 사도좌 공석이 된 순간부터 만 15~20일 사이에 콘클라베를 시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황청은 4월 28일 열린 추기경단 총회에서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5월 7일 시작된다고 발표했다. 콘클라베 기간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길어도 5일은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 선출 시에는 각각 5차, 4차에 걸친 투표로 이틀 만에 교황이 선출됐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경우 8차 투표로 콘클라베 기간이 사흘이었다. 20세기 이후 가장 길었던 콘클라베는 비오 11세 교황을 선출했을 때다. 1922년 열린 이 콘클라베는 5일에 걸쳐 14번의 투표 끝에 교황을 선출했다. 5월 7일 콘클라베가 시작되고 5일 이내에 투표가 마무리 되는 경향을 생각하면 늦어도 5월 중순에는 새 교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콘클라베는 콘클라베(Conclave)는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 ‘쿰 클라비스’(Cum Clavis)에서 온 말이다. 초창기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은 지역 성직자와 신자들의 선거로 뽑혔다. 그러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서 영향력이 커지자 교황 선출에 황제나 왕, 귀족들의 간섭이 커졌다. 이에 1059년 니콜라오 2세 교황은 선거권을 추기경들에게 국한시켰고,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 3분의 2 다수결 선출 방식이 결정됐다. 그러나 다수결 선출 방식으로 진행되다보니 1268년 비테르보에서 열린 교황선거는 1271년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긴 선거에 지친 비테르보 시당국과 시민들은 성당 문을 잠그고 빵과 물만 제공하며 빠른 결정을 촉구했고, 결국 2년 9개월 2일만에 교황이 선출됐다. 바로 첫 콘클라베다. 첫 콘클라베로 선출된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1274년 콘클라베를 제도화했다. 이후 세부적인 규칙은 수정·보완돼왔지만, 추기경단이 문이 잠긴 성당에서 3분의 2 다수결로 교황을 선출하는 형태의 콘클라베는 계속 이어오고 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공경하올 테오필로스(하느님의 벗) 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 부활 이후,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의 복음들은 빈 무덤을 본 제자들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두움에 빠져 있었지요. ‘어두움’은 길을 잃게 합니다. 빈 무덤 속에서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의 사라짐, 부재는 언제나 슬픔을 안겨주고, 사랑한 만큼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당신도 아실 겁니다. 마치도 지난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선종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 교황님을 한 번도 직접 뵙고 인사드린 적이 없습니다. 꿈에서 딱 한 번 그분이 저를 아기처럼 안아 주신 적은 있지요. 어떤 사람은 운 좋게 교황님과 악수를 하고 나서 평생 손을 안 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런 기회가 저에게도 있을까요. 그러다가 지난 2월 말, 제가 본당 청소년들과 함께 2025년 희년을 맞아서 일 년 반 동안 준비한 로마 성지순례를 가게 됐습니다. 분명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멀리서나마 교황님께 인사를 드리고, 설날 세배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 뵙기 일주일 전부터 그분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교황청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주님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시고 급히 입원하셨지요. 그래서 대신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찍은 사진과 새해 인사가 담긴 편지를 대신 전달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저희 본당은 지난 1월 새벽 미사 후 성전에 불이 났습니다. 신자분들은 성모상 앞에서 많이 우셨고, 청소년들의 이탈리아 성지순례도 취소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성당 화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마음속에 ‘내적 성전’을 세우는 일도 중요했기에, 서울에서 로마까지 이렇게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편찮으시단 말씀을 들었습니다. 쾌차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나중에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때 꼭 뵙고 싶습니다”라고요. 54명의 청소년 희년 순례단은, 교황님을 뵙는 대신에 로마 성모대성당에서 그분의 건강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테오필로스 님, 누구보다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돌아가신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은, 그분의 빈자리가 제게 무척 크게 느껴졌습니다. 알지요. 인간이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성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대성통곡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활 제2주일인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저는 많은 분들께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1월 12일 성당에 불이 났고, 소화기 들고 불 끄러 갔다가 유독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했다’고 하느님의 벗들에게 하소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이 난 2층 성당은 내부 철거로 텅텅 비어 버렸고, 십자가까지 사라져 스산한 공간으로 변해 마치 예수님의 빈 무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어디에도 주님이 안 계실 거 같은 이 자리에, 비 오는 토요일 어김없이 부활 성야를 맞이해야 했고, 본당 신자들은 비좁은 성당 카페에 앉아 미사에 참례하고 있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날 중에 지난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아침 수신인 삼각지본당 신부 이름으로, 교황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것은 3월 26일 교황청 국무원 국무장관 보좌관 로베르토 캄피시 몬시뇰이 보낸 '교황님의 답장'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께서 정성껏 전해주신 편지를 기쁘게 받아 보셨고, 그 안에 담긴 자녀된 마음의 신심과 존경의 뜻을 깊이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삼각지본당 신자들과의 희년 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전해주신 데에, 깊이 관심을 보이셨고, 성하께 드린 선물에 고마워하셨습니다. 또 신부님과 맡으신 사목 직무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를 약속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의 진심 어린 배려와 영적으로 함께해 주신 마음, 그리고 애정 어린 연대에 깊은 감사를 표하셨고, 삼각지본당 공동체가 함께 나눈 희년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아울러 교황 성하께서는 신부님과 신부님의 사목 직무에 맡겨진 모든 이들을 제대 앞에서 기도로 기억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희망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애로운 전구를 청하시고, 마음을 다해 교황 강복을 내리시며, 그 강복이 위로와 평화의 표징이 되고, 주님 안에 바라는 모든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이 ‘평화’를 빌어주시자, 그제야 그들은 환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당신 육신을 챙기기에도 버거우셨을 그 순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보내신 교황님의 답장은, 갑작스러운 화재와 복구의 지난한 과정에 지친 삼각지 본당 공동체에 부활의 선물을 주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테오필로스 님. 언젠가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뵙게 되겠지요. 아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부활이어도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느낄 수 없는 빈 무덤 같은 우리 마음에, 주님께서는 예기치 못한 편지로 그 사랑을 전하십니다. 그래서 빈 무덤은 이제 죽음의 거처가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고,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가 4월 26일 오전 10시(로마 현지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수됐다.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은 12년 동안 재임한 뒤 4월 21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평화롭게 선종했다. 교황의 장례미사는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주례했고, 전 세계 추기경단과 주교단, 사제단이 공동집전했다. 장례미사에는 수도자와 신자, 시민 등 20여만 명이 참례했다. 세계 각국 전현직 정상들은 장례미사 제단 가까운 곳에서 교황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장례미사가 시작되기 전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된 교황의 관을 봉인하는 예식이 먼저 거행됐다. 관 봉인 예식은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주례했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기록한 문서에 서명했으며, 패럴 추기경은 이 문서를 낭독했다. 봉인된 관은 14명의 운구자들이 어깨에 메고 장례미사 장소인 성 베드로 광장 제단으로 운구했다. 미사가 시작되면서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는 관 위에 복음서를 열어 올려놓았다. 곧이어 레 추기경이 관 주위를 돌며 분향 예식을 집전했다. 레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12년간 수많은 성체성사를 집전하셨던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슬픔을 안은 채 그의 시신 둘레에서 기도하고 있다”며 “우리는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 해가 지지 않는 행복한 삶 안에서 마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서 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하는 교황님의 마지막 모습은 심각하게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에게 축복을 주기 원하던 모습”이라면서 “우리는 지금 기도를 통해 교황님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행복을 그에게 허락하시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레 추기경은 강론을 마치며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제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하늘에서도 교회와 전 세계, 희망의 불을 높이 드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도 축복해 주소서”라고 간구했다. 1시간30분에 걸친 장례미사가 끝난 후, 교황의 관은 교황이 재임 중 이용했던 차량에 실려 로마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등을 지나 안장 장소인 로마 성모대성당에 도착했다. 교황의 관이 지나가는 약 6km 거리에는 장례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시민 15만여 명이 나와 교황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안장 예식은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교황의 유언대로 ‘프란치스코’라고만 적혀 있는 안장지 앞에 관을 놓고 패럴 추기경이 다시 관 덮개 위에 봉인 인장을 찍은 후 안장하면서 예식을 마쳤다. 교황의 무덤은 4월 27일 오전부터 신자들과 시민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추기경단도 27일 오후 교황 무덤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아울러 4월 23일 열린 추기경 전체회의 결정에 따라 5월 4일까지 9일간 교황을 추모하는 미사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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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제2회 '영아축복미사’

기록적인 저출생 시대에 성가정을 축복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구대교구는 가정복음화국(국장 김동현 요셉 신부) 주관으로 ‘제2회 대주교님과 함께하는 영아축복미사’를 봉헌했다. 4월 26일 오전 11시 대구대교구청 성모당에서 봉헌된 미사에는 300여 명의 영아와 그 보호자를 포함한 1200여 명 신자들로 가득찼다. 미사를 주례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는 영아 한 명 한 명에게 안수 축복했다. 지역 이주민가정 영아들도 축복을 받았다. 조 대주교는 “자녀를 낳고 하느님 말씀대로 잘 키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복음 선포”라며 “아이들을 하느님의 선물로 귀하게 여기면서 축복된 삶을 사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포항 죽도성당에서도 교구 총대리 장신호(요한 보스코) 주교 주례로 4대리구 영아축복미사가 거행됐다. 5월 3일에는 구미 원평성당에서 장신호 주교 주례로 5대리구 영아축복미사가 봉헌된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봉헌된 영아축복미사는 저출생, 고령화 사회를 살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하느님 축복을 받아 마땅한 일임을 상기시키고, 출산 장려와 함께 가족 간 친교와 화합을 도모하고자 마련됐다. 대구대교구 가정복음화국은 4년 전부터 매달 성모당에서 임신부 축복미사를 봉헌하면서 새생명을 품은 임신부와 배우자, 태아들을 축복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내가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 남짓 교황직을 수행하며 전 세계의 수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만나 위로와 희망을 줬다. 이에 본지는 2014년 방한 당시 교황의 수행비서 겸 통역 담당으로 교황의 곁을 지켰던 동아시아사목연수원 원장 정제천(요한·예수회) 신부와 한국 정부의 대표로 교황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간 이백만(요셉)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 예수회 정제천 신부(동아시아사목연수원 원장) 저는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위대한 영혼과 맞닿아있다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그 위대함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저에게는 경이롭습니다. 교황님은 이웃집 아저씨나 수도공동체의 선배 같은 친근함과 편안함을 줍니다. 거룩함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제 삶의 화두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거룩함을 사는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신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바로 교황님 자신의 내면 일기라고 짐작합니다. 교황님이 아시아의 첫 번째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한인 공동체와 성가소비녀회, 꽃동네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부지런하고 신심이 깊고 잘 단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방한 당시 온 국민의 아픔이었던 세월호 사건을 아시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고자 하였습니다. 남북 분단을 안타까워하시고, 모국어가 같다는 말은 어머니가 같다는 뜻이니 희망을 가지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또, 짧은 시간에 전쟁의 잿더미에서 강국으로 부상한 저력을 인정하면서 그 성장과 발전의 그늘을 직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입니다. 매사가 깔끔합니다. 전임 교황의 마지막 해에 각종 추문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던 교회가 그분의 등장으로 단숨에 말끔해졌습니다. 지난 2월 병원에 입원하시자 일부 언론은 조기 사임 등 섣부른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임은 최선의 답이 아니었습니다. 두 교황이 연이어 조기 사임하면 다음 교황이 큰 부담을 안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답을 갖고 계셨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바로 다음날 그분을 불러주셨습니다. 향년 88세였습니다. 지난 12년간 우리 모두 행복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 인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지금 교황님은 주님 곁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실 것입니다. “교황님, 사랑합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저희와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주교황청 대사 시절(2018년 1월~2020년 12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직접 뵐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아무래도 첫 만남과 마지막 만남이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첫 만남은 신임장 제정식 때였습니다. 2018년 2월 16일, 그날은 마침 한국 최대의 명절 설날이었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되어 열기를 뿜고 있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적으로 핵 단추를 운운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신임장 제정식을 마친 후 교황님의 개인 서재에서 개별알현을 했습니다. 교황님과 독대(獨對)를 하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교황청에 파견된 특명전권대사로서 교황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북한 방문 요청이었습니다. “교황님, 한반도가 무척 어렵습니다. 북한을 직접 방문하시어 북한 땅을 축복해 주시고, 북한 동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실 수 있습니까?” 교황님의 대답은 시원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왜 가지 않겠느냐. 기회가 되면 꼭 갈 것이다. 내 가슴과 머리에는 항상 한반도가 있다.” 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교황님은 방북 의사를 피력하신 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르헨티나 시절 겪었던 한국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특히 성가소비녀회 수녀들의 병원 봉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황님과의 독대는 이례적으로 40분 가까이 진행됐습니다. 교황님의 방북 프로젝트는 2019년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하노이 노 딜)로 아깝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씨는 살아 있었습니다. 2020년 대사 임기가 끝날 즈음 귀국을 앞두고 이임 인사차 사도궁을 찾았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할 때였습니다. 교황님께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교황님, 문재인 대통령에게 말씀하셨던 ‘소노 디스포니빌레(나는 북한에 갈 수 있다)’는 여전히 유효하지요?” “그렇고말고. 남북한 지도자의 손을 잡고 판문점을 걷는 게 나의 꿈이다.” 그냥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교황님의 한국 사랑은 절절했고, 북한 방문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나는 교황님께 한국식으로 큰절을 드렸습니다. 절을 받고 난 다음 흐뭇해하시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저서에서 찾는 영적 유산

4월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또 환경과 평화 등 인류 공동의 과제 앞에서 어떤 행동을 지녀야 할지 꾸준히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제 소중한 영적 유산으로 남은 교황의 주요 말들을 저서들 안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 희망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인류가 겪는 악의 비극을 외면하는 순진한 낙관론과는 다릅니다. 진정한 희망이란 어둠 속에 갇히지 않고,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으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밝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의 힘입니다.” (「희망」 510쪽) 최근 출간한 자서전 「희망」(2025, 가톨릭출판사)에서 교황은 절망이 만연한 시대 속에서 끝까지 희망을 선택하는 삶이란 무엇인지 묻고, 자신의 생애 전체를 통해 그 답을 보여준다. ‘희망은 멈춰 서지 않는 것이다’는 신념이 삶 전체에서 증명되는 듯하다. 그는 희망을 막연한 낙관이나 위로의 말이 아니라, 두려움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는 내면의 힘으로 보았다. 「그래도 희망」(2019, 가톨릭출판사)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바라고 지향해야 할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한다”고 역설한 교황은 “이 희망은 현재를 위한 원대한 목표, 즉 인류를 위한 구원, 자비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을 위한 지복을 제공해 준다”고 강조한다.(55쪽) 또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어떤 것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바로 거기에 문이 있고, 그 문에 이르는 것을 희망하며 문을 향해 걷는 것 즉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어떤 것을 향해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데 있다”고 풀이했다.(148~149쪽) ■ 자비·믿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2016년을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할 만큼 교황직에 머무는 동안, 이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자비의 마음과 실천을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수시로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비의 삶을 호소한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찰」(2015, 생활성서사)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적 시간은 사랑의 시간이자, 사람들 사이를 결속하는 시간”이자 “그것은 또한 서로 간에 벽을 세우는 시간이 아니라 세대 간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이어주는 시간”(149~150쪽)이라며 자비의 정신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빵을 나누는 행위를 모든 형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차원으로 넓혀가기 위해 책임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서 빵을 나눌 준비를 당부한다.(163쪽) ‘믿음’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과 다가올 세계」(2020, 가톨릭출판사)에서 “선포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고 말하고 “믿음은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보물을 전달하듯이 전해져야 하고, 교회는 ‘밖으로 나가는 공동체’이기에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신앙을 살아가자”고 밝힌다.(70쪽) 또 예수님이 하셨듯이 믿음을 전하자고 청한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합시다.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듯이 말입니다. 선동하려는 목적이나 공격적으로 반박하려는 완고함을 버린 삶의 양식과 선포 방식을 채택해야 합니다.”(148쪽)

종합

한국CPE협회, 100주년 맞아 전국 세미나 개최

1925년 6월 20일 미국에서 시작돼 임상 사목의 전문성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문적인 영적돌봄 교육을 제공하는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CPE협회(KACPE, 협회장 정무근 다미안 신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4월 2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제목으로 하는 CPE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는 한국CPE협회 소속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교의 성직자·수도자, 평신도와 의료인들 200여 명이 참석했다. 세미나에서 한국CPE협회 협회장 정무근 신부는 CPE 100년의 역사와 협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시대가 요청하는 다양한 영적 돌봄터(영적 돌봄 현장)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정무근 신부는 개회사에서 “CPE는 미국 장로교 소속 안톤 보이슨 목사(Anton Boison, 1876-1965)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면서 “그는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의 이론적 지식을 종교적 망상과 환청을 듣는 조현병 환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이해하는데 사용하여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보스톤 근교의 우스터 주립 정신병원에서 CPE를 처음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후 영적 돌봄터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일반병원으로도 확대되었고 그 이후 어린이 병원, 교도소, 학교, 요양원, 군대, 쉼터, 지역교회 등으로 확대됐다. 설립 이후 100년을 거치며 교육철학, 방법론, 실습지 등이 시대 상황에 맞춰 계속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정 신부는 이어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CPE가 지닌 이웃을 위한 영적 돌봄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기조 강연에서 정 신부는 1900년대 초 미국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강론이나 설교뿐만 아니라 영적 고통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상담을 시작한 이래, 교회가 ‘가르치는 교회’에 머물지 않고 ‘돌보는 교회’로 역할을 확장시켜 온 역사를 소개했다. 오후에는 호스피스 실제 돌봄 사례 분석과 다양한 실습지에서 CPE를 경험한 회원들이 나와서 자신이 돌봤던 영적 고통 중에 있는 다양한 이웃들에 대한 경험을 나눔으로써 앞으로 다양한 영적돌봄 실습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의정부교구 파주 EXODUS 위원장 김항수(파스카시오) 신부, 이석곤 군종목사, 대전지역 지구대장 이화정 경찰관 등의 다양한 돌봄 경험에 대한 나눔은 기존 실습지인 병원 현장에서 벗어나 더욱더 확대된 경험이었기에 이날 참석했던 참석자들에게 신선한 감명을 줬다. 한국CPE협회는 2002년에 미국에서 CPE 수퍼바이저 자격증(수퍼바이저 과정 지도 자격증 포함) 취득하고 귀국한 정무근 신부가 창립준비를 하고, 이후 2007년 4월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4대 종교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의료인들이 모여 창립총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한국CPE협회는 그동안 종교를 초월하여 전국에 CPE센터들(25년 현재 29개 센터)을 개설해 왔고, 꾸준히 수퍼바이저 교육과정을 통해 CPE 수퍼바이저들을 배출해 왔으며, 국내 임상 사목 교육의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협회로 자리매김해 왔다.

바오로딸 스탬프 투어 ‘놀러 간 김에 바오로딸’

성바오로딸수도회(관구장 김영미 마리루치아 수녀, 이하 수도회)는 4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전국 11개 교구 15개 바오로딸 서원에서 ‘놀러 간 김에 바오로딸’ 스탬프 투어 이벤트를 연다. 모든 서원에 비치된 스탬프 카드에 서원별 도장을 받아 모으거나 SNS 후기를 작성하면 ▲교구가 다른 스탬프 3개당 상품권 ▲본원 성탄 밤 미사 초대 추첨 ▲10월 25~26일 수녀원 북스테이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수원 화성, 안동 탈춤 축제, 전주 한옥마을과 전동성당 등 지역의 특색을 살린 일러스트의 2026년 달력도 한 장씩 모을 수 있다. 이외에도 각 서원만의 고유 행사도 마련했다. 혜화나무 서원은 성경 구절 캘리그라피 선물, 알베리오네센터 서원은 출판사 투어, 대구 서원은 ‘캘리 키링’ 증정 및 수녀원 경당 성체조배 기회를 제공한다. 원주 서원은 순례지 엽서 세트 증정, 인천 서원은 성모당 도슨트 투어, 대전 서원은 성심당 상품권 획득 및 ‘희망의 순례 특강’ 무료 참석, 광주 서원은 카페 할인과 가톨릭박물관 전시 해설 등을 준비했다. 수원 서원은 책갈피 만들기와 수원화성순교성지 달빛 순례, 부산 서원은 ‘성경 속 꽃’ 그림 카드 및 수제 키링 증정, 전주 서원은 한지 책갈피 만들기, 안동 서원은 전자파 차단 스티커 증정 등을 마련했다. 수도회 관계자는 “서원이 잠시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산책하듯 쉬었다 가는 휴게소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준비한 이벤트”라며 “각 서원에서는 교회 관련 책, 음반, 성물, 굿즈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영성 프로그램도 마련돼있으니 함께 즐겨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