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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집] ‘노동자들의 대모’ 도로시 데이 영성을 만나다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5-12-29 수정일 2015-12-29 발행일 2016-01-01 제 2976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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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는

‘하느님의 종’으로 미국교회서 시성 추진… 전쟁 반대한 평화운동가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9월 24일 미국 연방 의원들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꼽은 ‘위대한 미국인’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하며 주목을 받았다. ‘하느님의 종’(Servant of God)으로 미국교회에서 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웃과 힘없는 노동자들의 대모’로 불리며, 지난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자 100명에 뽑힐 정도로 존경받고 있다. 급진적 사회주의자에서 누구 못지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그의 삶은 ‘회심’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1897년 11월 8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개신교 신자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도로시 데이는 뉴욕의 사회주의 신문 ‘콜’과 월간지 ‘민중’의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자로서 진보적 활동을 펼치다 1927년 12월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결정적인 회심의 계기를 맞게 된다.

대공황 절정기에 일어난 ‘굶주림의 행진’을 취재하며 가난한 이들의 삶에 새롭게 눈뜬 그는 1932년 12월 멘토 피터 모린과 ‘가톨릭 노동자 운동’(가톨릭 워커)을 시작하게 된다. 이듬해인 1933년 5월 1일 가톨릭 노동자를 위한 신문 ‘가톨릭 일꾼’(The Catholic Worker)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35년 ‘환대의 집’을 열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듬해인 1936년까지 미국 전역에 33개의 환대의 집이 세워질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1936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펼치고, 불복종운동으로 반핵운동(1955~1961년)을 실천에 옮겼다.

1973년 일흔다섯의 나이로 농장노동자연합 시위에 가담해 마지막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그는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는 이유로 노트르담 대학교로부터 레테르 훈장을 받았다. 도로시 데이는 제도교회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 전통 안에서 본질적인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교회가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평화의 중재자’라는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 놓은 인물이다.

제주 강정에서 만난 도로시 데이의 손녀 마르타 헤네시씨

“할머니의 영성은 실천적 영성

멈추지 말고 나아가는 것 중요

강정에도 평화 실현되길 기도”

}의자에 앉은 채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들려나오길 다섯 차례. 12월 10일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디딘 후 떠나는 날인 27일까지 열여드레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은 일과였다. 어느 새 경찰들하고도 얼굴이 익은 사이가 돼갔다.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9월 24일 미국 의사당에서 연방 상·하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연설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위대한 미국인’으로 꼽은 네 명의 인물. 링컨 전 대통령, 마르틴 루터 킹 목사 등과 함께 교황의 입에 오른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의 친손녀인 마르타 헤네시(Martha Hennessy·60)씨는 자신이 함께하고 있는 일에 ‘브릴리언트’(Brilliant: 멋지다)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제주 강정에 도착한 첫날부터 매일같이 해군기지 공사현장을 찾았다. 오전 7시면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에서 어김없이 이어지는 ‘생명평화 백배 기도’가 하루의 시작이었다.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전 11시면 봉헌되는 생명평화미사는 그에게 남다른 감동의 현장이었다.

“도로시 할머니의 영성은 순교자와 성인들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씨가 전하는 도로시 데이의 영성은 교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박제화된 그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성인’으로 부르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요. 당신 자신이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자칫 신앙과 삶이 유리되는 현실을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미국 동북부 버몬트 주에 있는 작은 농장에서 살면서 뉴욕시를 오가며 자신의 할머니가 세운 메리 하우스 ‘가톨릭 일꾼’(The Catholic Worker)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교회를 통해서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심리치료사로 활동하며 특별히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관심을 둬왔던 그를 할머니 도로시의 길로 다시 이끈 것 또한 어릴 적 할머니가 그에게 심어주었던 영성이었던 셈이다.

“도로시 할머니는 조금은 특별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셨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던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해변을 걷고,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그 사람 곁에 앉아 쉬고, 잔잔한 만으로 나가 함께 배를 젓고, 들판과 숲을 돌아다녔다. 내게는 온전히 새로운 경험, 생명과 기쁨을 얻어 누리는 경험이었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라. 어떻게 하느님이 없을 수 있을까?”(도로시 데이 자서전 「고백」 중에서)

마르타씨는 자신의 할머니 도로시가 연애시절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가톨릭 일꾼’ 공동체가 운영하는 ‘환대의 집’을 찾는 노숙인과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과 옷가지 등을 제공하는 일상적인 일 외에도 자신의 할머니가 1933년 5월 1일 창간한 평화주의 노선의 가톨릭 노동자 신문 ‘가톨릭 일꾼’(The Catholic Worker) 발행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곳을 직접 찾아 함께하는 것도 할머니 도로시가 몸소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찾은 분쟁 현장만도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란, 이라크, 이집트 등 일일이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지금껏 존재 자체도 모르고 지내던 제주 강정마을을 찾은 이유도 ‘평화’라는 고리로 이어진다. 미국 북서부 워싱턴 주 타코마 ‘가톨릭 일꾼’에서 평화 활동을 펼치던 빌 빅스(Bill Bichsel) 신부(예수회)가 지난 2013년 9월과 2014년 11월 두 차례 강정마을을 다녀가면서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눈길도 세상의 다른 끝에 와 닿게 된 것이다.

자신과는 아무 인연도 없었던 해군기지 공사 현장을 지키며 하루에도 몇 번씩 군용차량을 온몸으로 막아서는 마르타씨의 행동에 공사 관계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멈추지 말고 계속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르타씨가 자신의 삶과 운동을 통해 얻은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그는 “우리가 충분히 사랑한다면 끈질기게 나아갈 수 있다”는 도로시 데이의 말을 상기시켰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맞이하며 살아가는 일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통해 더 많은 축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더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해군기지 앞에서 봉헌되는 매일미사와 전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찬례적 저항’(Eucharistic resistance)이 실현되는 현장, 그곳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더럽혀지고 상처받은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는 그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끈기 있는 실천에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 도로시 데이의 손녀 마르타 헤네시씨가 12월 23일 제주 강정 해군기지 공사현장을 지키고 있다. 생명평화 백배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며 강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에 함께했다.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