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용소막 유물관(상)

정복례 수녀(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역사실),사진 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역사실 제공
입력일 2015-08-04 수정일 2015-08-04 발행일 2015-08-09 제 2956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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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의 대가 선종완 신부 유물 전시
선종완 신부(1915~1976)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소재 ‘용소막 유물관’ 전경.
‘용소막 유물관’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원주교구 소속 용소막성당 관할 내에 자리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1915~1976)의 유물관이다. 2015년 8월 8일, 선종완 신부는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용소막 유물관의 유물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선 신부가 걸어온 길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용소막성당 출신 선 신부는 성서학자로서 서울 가톨릭대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부유한 집안의 3대 독자로 태어난 선 신부는 인간적인 소망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주길 간절히 원했던 부친의 애원을 물리치고 사제의 길에 오른다. 신학생 때, 교수 신부로부터 한국교회는 성서학의 불모지라는 말씀을 듣고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는 히브리어와 같은 고전어를 아무 데서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책을 구입해서 온전히 독학으로 공부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학부를 마칠 즈음에는 구약성경 연구에 필요한 고전어를 마스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됐다. 외국어를 한 번만 보면 기억하는 타고난 천재성과 성실한 노력이 만나, 훗날 선 신부는 한국교회에서 단연 독보적인 성서학자로 우뚝 서게 된다.

1942년 2월 14일, 선 신부는 동료 박성춘 레오와 함께 학사일정보다 몇 달 앞당겨 사제품을 받게 된다. 본래 사제서품식은 6월 24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는데, 황국화 작업을 서두르던 일본이 용산 신학교를 미인가 교육기관이라는 이유로 폐교를 명령하면서 앞당겨졌다. 이리하여 선 신부는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이 됐다. 선 신부는 사제품을 받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유학해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한 후 귀국, 모교에서 잠시 성경을 가르쳤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이어서 1952년 6월까지 예루살렘 성서연구소에서 성서고고학을 연구하고 귀국해 다시 모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선 신부는 1955년 3월부터 구약성경 단독번역에 착수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구약성경 번역은 1968년 성경 공동번역 가톨릭 측 전문위원으로 위촉될 때까지 계속됐다.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성경 공동번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종교일치운동 차원에서 일어난 세계적인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다. 성서학자로서 자신의 단독번역을 중단하고 개신교회 학자와 공동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순교에 버금가는 희생을 요구했지만, 그는 교회에 기꺼이 순명했다. 결국 자신의 단독번역은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1976년 7월 11일, 간암으로 선종하기 며칠 전까지 공동번역 원고를 마지막 한 장까지 탈고하느라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선 신부의 이러한 사투를 거쳐 완성된 공동번역 성경은 그의 선종 1년 후, 1977년에 출판돼 2005년 가톨릭교회에 새 성경이 나올 때까지 가톨릭과 개신교회에서 공동으로 사용됐다.

유물관 안에 있는 육각형 책상은 선 신부가 손수 설계한 책상으로서 그가 살아생전 신학생들을 위한 수업준비와 구약성경 단독번역을 했던 작업장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한국어로 탄생한 산실인 셈이다.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여러 가지 책들을 봐야 하는데 일반 사각형 책상은 불편하기 때문에 작업하기 편리하게 육각형 책상에다 계단식 독서대를 설치했던 것이다. 선 신부는 실생활에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사용해서 수녀들을 놀라게 했다. 훗날, 자신이 설립한 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의 경제적인 기반이 됐던 양계장을 운영할 때는 계분이 많이 나와 그것을 이용해 메탄가스를 만들어서 취사가스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가정의 가난을 사랑했던 선 신부는 흐르는 물도 아껴쓰라고 할 정도로 청빈정신을 철저히 살았다.

성경 번역 작업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창세기 1장 1절, 번역 원고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썼다 지웠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한 구절이 완성된다. 이렇게 어려운 정신노동을 통해 히브리어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이다. 선 신부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자신의 한국말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예술, 문학 분야 등을 부지런히 섭렵했다. 본래 음악을 좋아해서 학창시절 음악을 전공하고자 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외국 클래식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의 정서를 알기 위해서 대중가요도 자주 들었다.

선 신부는 예루살렘에서 고고학을 연구할 때, 수업이 끝나면 국립박물관으로 가서 일일이 하나하나 유물들을 그리고 메모했다. 수업시간에 신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좋은 교육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직접 그렸던 것이다. 그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서 성서연구소에서 박물관까지 도보로 1시간이 훨씬 더 걸리는 거리인데도 거의 매일 그런 고행을 반복했다니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뿐만 아니라, 선 신부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지도를 직접 손으로 그렸다. 성경을 가르칠 때 사용하기 위한 교육 자료였다. 현재 고급스럽게 인쇄돼 나오는 지도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용소막 유물관은 미리 연락하면 언제라도 안내받을 수 있다.

※문의 010-8647-3166 용소막 유물관 담당자

선종완 신부가 구약성경을 단독번역 했던 작업장의 육각형 책상.
선종완 신부가 예루살렘 유학시절 때 자필로 작성한 고고학 메모수첩.
수없이 고쳐 쓰며 번역한 선종완 신부의 창세기 번역 원고.

정복례 수녀(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역사실),사진 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역사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