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 필리핀을 가다 (하)

필리핀 카바떼 이지연 기자
입력일 2015-04-28 수정일 2015-04-28 발행일 2015-05-03 제 294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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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만 아니었던 한국생활 신앙으로 위안 얻어”
발릭바얀들이 주교회의 이주사목위 실무자들에게 한국생활과 필리핀 귀국 후 현실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은 발릭바얀(Balikbayan, 해외에서 돈을 벌어 돌아온 필리핀인)들의 마음 속에 제2의 고향이다. 필리핀 카바떼에 위치한 ‘엠마우스’에서 만난 발릭바얀들은 모두 한국을 그리워했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발릭바얀

19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한 가이씨는 “내 마음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가이씨는 1991년 처음 입국해 발전하는 한국을 다 지켜봤다. 한창 경기가 좋은 시절에 한국에 들어와 안 해 본 일이 없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두 달 동안 직장을 구할 수 없어 마음을 졸리며 시간만 보내야 했던 적도 있다.

“그때 돈이 없으니깐 먹을거리를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굶어야 할 정도로 힘든 시기였죠. 다행히 수원 엠마우스의 도움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나요. 힘들지만 감사한 시간들이었어요.”

준씨는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를 회상했다. 정착 초기에는 낯선 문화와 기후, 음식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직장생활도 쉽지만은 않았다. 프레스기계를 다루고, 바닥재를 제작하는 등 익숙하지 않은 일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4년의 합법 체류 기간이 끝난 이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살아가면서도 힘겨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2012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 모든 것들이 그립다고 고백했다. 그 역시 한국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 일과 친구들이 다 한국에 있기 때문에 정말 간절하게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필리핀에서는 힘듭니다. 아이들은 키워야 하는데 일자리도 없고 경제적으로는 더 어려워져서 다시 외국으로 돈을 벌러 갈 생각입니다.”

가이씨와 준씨를 비롯한 발릭바얀들은 타국생활의 외로움과 설움을 극복하고 한국에서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를 ‘신앙심’에서 찾았다. 가이씨는 필리핀인을 대상으로 한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 자양동, 혜화동, 수원 화서동 등을 찾아다녔다. 미사 후에는 함께 모인 필리핀인들에게 요리를 만들어 줘서 엄마라는 뜻의 타갈로그어인 ‘나나이’ 가이라고 불렸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은 처치에 있는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고향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총무 최병조 신부는 “이주민들은 공동체와 주님 안에서 위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고 이야기한다”면서 “한국교회가 이주민을 위해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각 국가별 신앙공동체를 활성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험을 나누고 미래를 꿈꾸는 EIMA

한국에서 신앙공동체로 끈끈하게 묶여 있던 발릭바얀들은 필리핀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최병조 신부의 지원 아래 발릭바얀들로 구성된 NGO ‘EIMA’(Emmaus International Migrants Association)를 발족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EIMA에 소속된 발릭바얀은 15명으로, 모두 수원 이주노동자사목센터 엠마우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학생, 이주노동자, 선교사들이다.

EIMA는 주로 장학 사업과 무료급식 사업을 진행한다. 또한 한국 봉사자들과 단체들을 도움이 필요한 필리핀 현지와 연결해 주고, 한국인들에게 필리핀에서의 발릭바얀들의 삶과 현실을 알리는 작업도 하고 있다. 4월 10~15일 필리핀에서 열린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전국 실무자 해외선교연수에 참여한 실무자들과도 발릭바얀들이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와 필리핀으로 돌아온 후의 생활 등을 나눴다.

최 신부는 “EIMA는 한국과 필리핀의 친선을 도모하는 모임이자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라는 이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단체”라고 설명했다.

아직 시작 단계의 NGO라서 제대로 된 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지만 EIMA의 비전만은 확실하다. 더 많은 이주민들이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민을 준비하고, 현지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을 바탕으로 EIMA는 발릭바얀들의 한국 경험을 나누는 세미나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자리를 통해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EIMA 사무국장 마조리 비달씨는 “필리핀에서 알고 있는 한국과 현지에서 접하는 한국은 많이 다른데, 적지 않은 이주민들이 미처 그런 사실을 모르고 간다”면서 “우리의 경험을 나눠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조금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발릭바얀 가족들과 미사.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 전국 실무자들과 발릭바얀들이 기념촬영했다.

■ EIMA 사무국장 마조리 비달씨

“이주노동·결혼이민 앞둔 이에게

한국생활 경험 나누며 실질적 도움”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들은 많은 도움이 필요해요. 특히 그들이 타국에서도 존엄성을 존중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역 사회가 나서서 인도주의적 사회 문화를 형성해야 합니다.”

EIMA 사무국장 마조리 비달(Marjorie I. Vidal)씨는 이주민들을 환대하는 ‘만남의 장’을 마련하는 일은 개인이 아닌 지역 사회가 함께할 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수원 이주노동자사목센터 엠마우스에서 활동했던 경험 덕분이다.

비달씨는 수원 엠마우스에서 필리핀 이주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이주노동자는 고용주에게 여권을 빼앗겼고 다른 노동자는 물도 나오지 않는 작은 컨테이너에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지만, 자신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조차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해 몰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지난해 필리핀으로 돌아온 비달씨는 최근 필리핀 정부에 EIMA의 NGO 등록을 마치고, 발릭바얀 15명과 함께 이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심하고 있다.

“한국에 가기 전에는 모두 핑크빛 미래를 꿈꾸지만 막상 가보면 고달픈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죠. 저희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이주를 준비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세미나와 교육을 마련해 나갈 겁니다.”

필리핀 카바떼 이지연 기자 (mar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