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연극 ‘기억의 조건’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입력일 2015-04-21 수정일 2015-04-21 발행일 2015-04-26 제 294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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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지워버리는 일
연극 ‘기억의 조건’ 포스터.
요즘의 수사극은 한마디로 대단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완전범죄와 완벽수사 기법. 뛰는 놈과 나는 놈의 현란한 밀당(밀고 당기기의 줄임말). 죄를 돕기도, 잡기도 하는 놀라 자빠질 최첨단 과학기술, 귀신같은 수사관과 귀신같은 범죄자의 대단한 한판 대결이 보는 사람의 뇌를 자극하고 잠시 쉴 틈을 안 준다.

미해결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는 연극 ‘기억의 조건’도 뇌운동이 부지런해야 따라잡을 수 있는 수사극이다. 사건이 미해결인 이유는 용의자들의 기억이 깊이 가라앉아 있기 때문. 그들의 기억을 살리는 것이 관건이다. 죽은 것을 살린다. 그 조건이 뭘까 궁금해진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4월 1일, 부산의 변두리 재개발구역의 어느 폐가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된다. 고등학생 성태와 기태다. 그 현장에는 룡이와 정신지체자 철이가 있었다. 그 둘은 언제 어디서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시체 옆에 그 둘이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단서다.

수사팀은 최면술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렇게 조금씩 살려낸 기억에 의하면, 룡이와 죽은 두 학생은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고등학생이 되어 5년 만에 우연히 만난다. 셋 모두 랩에 관심이 많아 랩대회에 나가기로 결정한다. 변두리 폐허를 연습장소로 정한다. 폐허에서 노숙하는 7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철이를 만났다. 철이는 세 사람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지만 이들은 툭하면 철이에게 담배와 술, 심부름을 시켰다. 여기까지는 잘 왔는데 정작 4월 1일엔 텅 비었다. 살려낼 기억이 아예 없다. 수사팀은 그때까지 알아낸 조각을 짜 맞춰 대본으로 만들고 직업배우를 고용한다.

둘은 배우가 분한 성태와 기태와 함께 3년 전 그 자리 그들만의 그곳으로 간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향해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연극은 슬쩍 옆길로 샌다. 젊고 영리한 연출가는 랩이라는 장치로 뻣뻣한 수사물을 환호와 박수가 있는 콘서트장으로 바꾼다. 최면수사를 이끌어가는 강박사팀이 막강래퍼로 분해 입술이 안 보이게 날래고도 정확하게 랩을 날려댄다. 물론 룡이네도 만만치 않다. 관객은 휘파람을 날리고 박수를 쳐대며 열렬한 호응을 보내준다.

랩대회 결과는 룡이네가 꼴찌. 세 사람은 어깨가 처져서 폐허로 돌아온다. 기억의 마지막 퍼즐이 찾아지려는지 궁금해진다. “와 그라는데?” 철이가 폐허로 돌아온 세 사람에게 묻는다. “기분 나빠서 그란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아 그라몬 이거 묵어라, 우리엄마가 기분 나쁠 때 묵으라고 내 열 살 때 주고 간거다” 철이가 또박또박 말한다. 하얗고 고운 가루다. 성태가 먼저 먹는다, 기태도 따라 먹는다, “야, 야, 먹지마” 룡이의 히스테릭한 비명이 기괴한데 성태와 기태는 몸을 괴롭게 뒤틀기 시작한다. 보고 있던 철이가 웬일인지 환한 얼굴로 말한다 “그거 청산가리다, 기분 좋나?” 사건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느낌 생각 의견 판단 등을 다 걸러낸 순수기억,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능할까. 룡이는 공포와 후회, 철이는 환한 기쁨을 기억했다. 그들은 무엇을 후회했으며 무엇을 기뻐했을까. 기억해야 하는 건 그 안에 있다. 기억이란 생각해내는 일이 아니라 지워버리는 일이다. 지워 낸 그 자리에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을 채워 넣도록. 연극에는 없는 용서와 화해라는 말이 맴돈다. 나와 너를 용서하고 나와 네가 화해하는 것. 그것으로 삶은 힘들게 그러나 분명 조금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극작가이자 배우로서 연극 ‘꽃상여’ ‘안녕 모스크바’ ‘수전노’ ‘유리동물원’ 등에 출연했다.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