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토란대 이야기 / 이홍재

이홍재(치릴로·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
입력일 2014-10-21 수정일 2014-10-21 발행일 2014-10-26 제 291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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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산골의 모습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모퉁이마다 영글던 생명의 기운이 씨앗 속으로 갈무리되고 이제 산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농부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집니다. 도회지 사람들에게는 단풍행락의 계절이지만 농부는 일 년 동안의 결실을 거두어들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봄부터 몸소 가꾸어 온 것들이라면 모든 애정과 스토리가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황금빛 일렁이는 들판의 나락을 거두어들이는 가을걷이도 중요하지만 매번 찬거리를 의지하던 텃밭에 대한 미련은 더 많이 가는 듯 합니다.

어릴 때 어머님이 끓여주시던 추어탕에 들어 있던 토란대의 맛을 잊을 수 없어 토란을 직접 심고 키웠습니다. 귀농 후 농사 목록에는 매년 올라 있었지만 직접 키운 것은 올해가 두 번째입니다. 첫 해는 경황이 없어 수확을 하지 못하고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먹는 것은 내가 농사 지어야지’라는 오기와, 커다란 잎 위를 굴러다니면서 하늘의 구름까지 담고 있던 물방울과 다소 이국적이기도 한 시원시원한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봄에 이웃집에서 심고 남은 씨뿌리를 얻어와 2평 남짓 심었습니다.

옆지기는 토란 독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 토란 농사를 거들 수 없다고 에둘러 손사레를 칩니다, 마트에서 사 먹으면 얼마나 한다고 또 일을 벌인다고 타박하는 것이며, 지난번처럼 또 버리고 말 것이라며 앞서 기운을 빼고는 하였습니다. 토란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옆지기가 수시로 빗장을 쳐 놓은 상태라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어머님이 토란 갈무리를 할 때 이것저것 도와 드리고 하여, 토란 농사는 심어놓고 가을에 토란대를 베고 줄에 엮어 담장 위에 말리기만 하면 끝나는 가장 쉬운 농사인 줄 알았습니다. 껍질을 벗기는 지난한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어릴 때는 알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호박잎 껍질 벗기는 생각으로 간단히 대한 토란대 껍질 벗기기는 이내 한숨과 후회가 얼키고 설킵니다. 평상시에도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겠다’고 공언하는 옆지기는 여자가 집안에서 살림살이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직접 해봐야 한다면서 주위를 빙빙 돌면서 불질만 합니다. 그동안 잘못한 것이 많은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집니다. 토란농사를 올해도 실패하면 옆지기 볼 면목이 서지 않을 것은 물론 남은 평생 토란국이란 말도 꺼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나절 동안이나 주물럭거리면서 벗긴 결과는 완전 참패입니다. 시들려 말려도 보고, 끓는 물에 데쳐도 보고 이틀에 걸쳐 껍질 벗기기를 끝내고는 이제 말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어주고 그렇게 어렵게 끝낸 작업을 혹시 비로 망칠까봐 외출도 하지 못하고 수시로 일기예보를 들여다 봅니다. 차마 토란대 때문에 못 간다 말할 수 없어 취소한 일정도 몇 개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말려 놓고 보니 조그만 봉지 몇 개 분량입니다. 감개무량하여 차마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 보름이나 정성을 들인 결과가, 막걸리 한 잔 값도 나오지 않습니다. 직접 농사를 지어보니 나물 한 봉지의 제 값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시장골목에 깨끗하게 손질하여 다듬어 놓은 천 원 모데기 나물 파는 그 할머니가 갑자기 적선하는 성자 같아집니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 제고를 두고 세미나를 하는 학자와 공무원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줄어드는 농지면적 대안으로 밀보리를 심어 이모작을 하면 된다고 하고 혹자는 외국의 경작지를 개발해야 된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GMO 작물과 식용곤충을 추천하고 모든 농산물의 완전한 수입개방을 이야기합니다. 그들도 우리나라 향후 먹거리의 심각성을 문제로 인식하고는 있는 모양입니다. 모두가 떠나고 없는 농촌에 고양이 목에 매달 방울만 생각하고 그 방울을 매달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경제시대의 필연적인 현상으로 불시에 찾아오는 경제적 디폴트에 대한 최대의 보험은 우리의 농업입니다. 농사는 지식과 경제력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과 소명의 문제입니다. 농업은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따지며 삼키고 뱉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농업은 교육처럼 평상시 다져놓아야 하는 인륜지대사입니다.

이홍재(치릴로·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