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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특집-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살리라] 나의 죽음, 나의 부활

김진영 기자,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04-15 수정일 2014-04-15 발행일 2014-04-20 제 2891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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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박해와 죽음, 부활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우리 곁의 수많은 신자들이 오늘날 나타나는 다양한 박해를 딛고 순교하고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삶 안에서 부활을 체험한 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죽음 체험 후 새 인생 사는 윤석용 씨

“기쁘고 새로운 매일 … 봉사·선교 덕분이죠”

“삐하는 소리와 함께, 의사의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들렸어요.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와 절친한 친구가 저에게 잘 가라며 하는 이야기도 들었죠.”

20여 년 전 퇴근길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던 윤석용(스테파노·62·전주 효자4동본당)씨는 의사의 사망 선고를 받고 영안실로 이송됐다. 가족과 친구의 흐느낌을 뒤로한 채 떠난 윤씨는 얼마 뒤 자신의 두 발로 영안실에서 걸어 나왔다.

“영안실로 옮겨진 뒤 제가 일어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어요. 한 3~4시간쯤 지난 것 같기도 하지만, 저도 가족들도 다들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죠. 확실히 기억나는 건 영안실에서 눈을 뜨고 숨을 쉬었을 때의 느낌이었어요. 폐까지 느껴지는 싸늘함에 ‘내가 다시 살아났구나’하는 것을 느꼈죠.”

영안실에서 나와 간호사들을 찾아가자 병원에 난리가 났다. 담당 의사들도 가족들도 다함께 달려 나왔다. 의사가 링거를 놓자 몸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은 윤씨가 소리를 질렀고, 링거를 제거하고 온몸을 마사지했다. 이후 윤씨는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다. 기적이었다.

“제 시신이 영안실로 옮겨질 당시 제 영혼은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 길 끝에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 분들이 아직 저에게 할 일이 남아있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신비한 체험이었죠. 그 뒤 눈을 떠보니 영안실이었어요. 퇴원 후 제가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봉사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죽음을 경험해 본 탓인지 윤씨는 호스피스 봉사에 마음이 끌렸다. 아내와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며 본격적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젊은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봉사를 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말들을 많이 했지만, 돈 버는 것보다 소중한 것을 찾자고 확신하게 된 윤씨의 결심을 흔들지는 못했다.

“이렇게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해요. 특히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리면서 마음 편히 떠나가실 수 있도록 해드린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호스피스 봉사 외에도 여러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를 하던 윤씨는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시키는 것도 큰 봉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신학원에 입학했다. 신학원 졸업 후 십여 년 동안 6탄약창, 해성중, 전북대병원, 교도소 등 다양한 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매년 이삼백 명이 세례를 받도록 인도했다. 이 일이야말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이라 생각하는 윤씨는 매일이 기쁘기만 하다. 남들이 못한 신비한 체험을 해본 덕분일까 묻는 질문에 윤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종종 제가 한 신비한 체험에 대해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곤 해요. 그러나 그럴 필요가 과연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봐요. 제 체험보다 더 신비하고 놀라운 일들이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걸 믿어야죠.”

■ 순교 영성으로 새 삶 맞은 김정자 씨

"죽음 이겨낸 순교자 삶 통해 희망 찾았습니다"

김정자(안젤라·61)씨는 성지안내봉사만 벌써 10년 이상 해왔다. 생활이 어려워 다른 봉사는 모두 그만뒀지만 이 봉사만큼은 그만둘 수 없었다. 성지봉사가 주는 ‘순교 영성’이 삶에 부활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평탄하던 김씨의 삶은 3년 전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융자를 받아 땅을 샀지만, 계획과 달리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가진 재산을 모두 빚 갚는 데 쓰고 집마저도 팔았지만,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당장 먹고 살 일조차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젊은 시절에 이런 어려움이 닥쳐왔으면 힘들어도 이겨낼 힘이 있었으련만. 절망에 사로잡힌 김씨의 머릿속은 손 쓸 도리도 없는 이 재앙 앞에 ‘죽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박해시대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간 신앙선조들이 떠올랐어요. 그분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나니 내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음’이 가득하던 마음에 부활의 빛을 비춘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자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삶 전체를 천주께 맡기고 모든 것을 버리고 천주만을 바라보던 순교자의 삶이 절망에 빠져있던 김씨를 건져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김씨는 ‘그동안 순교 영성을 키워온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감사함을 느낀다.

순교자의 삶에 관한 묵상을 통해 부정적이기만 하던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니 실낱같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가족이 더 일치되고 서로 배려하면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또 조금이나마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자리도 구할 수 있었다.

김씨는 “순교 영성은 하느님이 모든 길을 다 막아 놓지는 않았을 것이란 믿음을 줬다”면서 “이제는 어려운 고비가 닥쳐오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교자들이 살아온 터전을 가보면 신앙선조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열어 놓으신 분들이셨음을 느끼게 돼요.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셨고 순교는 그 결과로 마지막에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김씨가 순교자의 삶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비자교리 중 순교자에 관한 교리를 들으며 감화를 얻은 김씨는 한국순교자현양회에서 주관한 교회사 강의를 듣고 순교자의 삶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 정기적으로 절두산순교박물관 안내봉사와 한국순교자현양회가 주관하는 전국성지순례를 진행하고 또 개인적으로도 성지를 순례하면서 ‘순교자의 죽음’보다도 ‘신앙선조의 삶’을 묵상하게 됐다.

특히 김씨는 두드러지고 유명한 성인이나 순교자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의 삶에 관심이 많다.

김씨는 “우리나라에 103위 성인이 계시지만 그 성인의 이름을 대라면 몇이나 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신앙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김씨는 순교 영성을 키워 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 대로 성지를 순례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공부할 뿐 아니라 휴일에는 성지를 찾아 안내봉사를 하고 있다.

“봉사라기보다는 제게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성지에서 봉사를 하며 순교 영성을 새롭게 다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신앙선조들은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봤어요. 제 봉사로, 그런 신앙선조들의 마음이 순례하시는 분들에게 전해졌으면 해요.”

김진영 기자,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