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겨울이야기

방영숙(골롬바·부산교구 언양본당)
입력일 2014-03-05 수정일 2014-03-05 발행일 2014-03-09 제 288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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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남 알프스가 시작되는 고헌산 기슭 530m 고지. 아늑하고 평화로운 산골짝 작은 마을 - 소호. 눈 뜨면 저 멀리 멋진 백운산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언덕 위의 외딴 집. 우리 집 기둥에는 ‘소호대곡길 148-22’라고 뚜렷하게 적힌 문패가 붙어있다.

지금 나는 하얀 집 창가에 앉아 새하얀 눈에 덮인 산과 들을 바라본다. 올겨울 유난히 많이 내리는 눈, 눈, 눈. 열흘째 계속 내리고 있는 눈. 때로는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때로는 소리 없이 조용히 내려앉는 싸락눈. 가끔은 회오리바람에 은빛 눈가루 흩날리며 속삭이는 그들의 사랑 얘기 듣는다.

넓은 잔디 위엔 폭신한 화이트 카펫 깔리고, 하얀 면사포 쓴 성모 동굴. 입에 넣으면 살살 녹을 것만 같은 - 아이스크림 소복이 담긴 통나무의자. 반가운 소식 찾아오는 우체통,

우리 꿈을 가득 실은 나무 그네. 눈꽃 송이 활짝 피우고 미소 짓는 겨울나무들. 눈비 맞으며 좋아라 꼬리 치는 하얀 복실이 형제. 눈에 보이는 모두가 아름다운 설경 속 풍경이다. 나는 오늘도 커다란 창가에 앉아 새하얀 동화 나라의 주인공 되어 예쁜 꿈을 꾼다.

우리 부부가 이곳을 처음 찾아왔던 그 해에도 이렇게 눈이 많이 왔었지. 아름다운 설경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던 조그만 산촌 - 소호와의 황홀했던 첫 만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얀 눈이 녹을 무렵 봄이 찾아왔고, 산과 들은 푸르게 푸르게 물들어 갔지. 달래, 냉이, 쑥 캐느라 즐거운 휘파람 불며 산나물, 산딸기, 다래 순 따는 재미에 피어오르는 함박웃음.

생전 처음 일궈보는 채소밭에 골 따라 갖가지 씨앗 뿌리고, 어린 모종도 심고, 여름내 잡초 뽑고 하나하나 돌보느라 땀 흘리며 잠시도 쉴 새 없이 바쁜 가운데 산과 들은 단풍잎 갈아입고 곱게 곱게 물들어갔지. 땀과 정성으로 이룬 보람 결실되어 우리 품에 안기던 날. 첫 수확의 기쁨과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70대 늦은 나이에 전원생활을 시작한 우리 부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며 만류하는 지인들의 염려를 뒤로하고 용감하게 찾아든 이곳에서 우리는 어느새 세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하루에 세 번 마을버스가 다녀가는 산촌마을. 이곳에도 옛날에는 공소가 있었으나 없어진 지 오래되고 지금은 몇 안 되는 교우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공소예절로 미사를 대신하고 있지만, 큰 첨례와 본당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함께 모여 성당에 가는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는 순박한 교우들이 사는 아름다운 이곳 - 소호.

우리 부부의 노후를 이곳으로 이끌어주신 주님 은총에 감사드리며, 소박한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방영숙(골롬바·부산교구 언양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