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데스크칼럼] ‘호반’의 추억 / 이주연 편집부장

이주연 편집부장
입력일 2013-10-15 수정일 2013-10-15 발행일 2013-10-20 제 2866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2년 전 7월 아일랜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수도원 자취를 살펴보는 기획취재 일환이었다.

아일랜드라고 하면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올해로 한국진출 80주년을 맞을 만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해방 이후 한국교회 건립의 발판이 되어주었던 선교의 역군들이지 않은가. 그 인연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아일랜드 지부가 있는 ‘나반’지역의 ‘달간파크’는 수도 더블린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도착해 보니 지부 건물은 50여만 평의 푸른 초원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960~1970년대 까지 200여 명의 신학생 양성이 이루어 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40여 명의 회원들만 거주할 뿐이다.

개중에는 한국에서 수 십년 선교 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귀국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한국인들의 방문은 시집보낸 딸이 친정을 찾은 격이었다. 함께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던 중 성당 뒷 좌석에 앉아 한국어로 주님의기도를 함께 봉헌하는 은빛 머리 초로의 선교사들 얼굴에는 짙은 감회가 서려 있었다.

수 십년 동안 원주·광주·부산·인천 교구 등에서 선교했다는 브렌단 호반 신부는 이날 아침부터 바빴다고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일랜드 특유의 궂은 날씨였음에도, 선교회 건물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선교사 묘지를 찾았다는 호반 신부. 모처럼의 한국교회 신자들 방문을 맞아 한국에서 활동하다 선종한 선교사 무덤에 흰색 리본을 달았다고 했다.

짧은 방문을 마치고 다른 행선지를 향해 돌아서는 길, 유독 이날 한국 신자들 맞이에 여념이 없었던 호반 신부는 헤어짐이 아쉬워 버스에 올라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는 그가 기억하는 한국 가요를 기념으로 들려줬다. 언젠가 가보았던 호반의 도시 춘천이 생각난다고 했다. 또 자신의 패밀리 네임이 ‘호반’인 것과 같은 발음이어서 일까. 그 가요의 끝자락은 ‘호반의 벤취에 가보고 싶네~’였다.

그가 들려준 호반의 추억에 대한 노래는 내내 마음에 잔향으로 남았다. 한국에 무언가를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받았다고, 풍성한 나눔의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노 선교사의 말도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전교주일을 맞으며 떠올려진 기억이다. 무엇보다 당시 호반 신부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고 배웠다’고 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80년 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회원들이 복음의 싹을 놓고 틀을 키웠던 한국교회는 2013년 현재, 30여 년의 선교사 파견 역사 속에 비약적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해서 세계 각 곳 오지에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늘 반복되는 얘기지만, 아직은 “선교의 중요성은 인식한다”하면서도 ‘해외선교’라고 할 때는 늘 남의 집 이야기를 듣는 듯, 자신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누군가가 하는 일로 생각하는 사고가 여전한 현실이다. 그런 배경에서 전 교회적인 차원의 체계적인 선교사 교육도 부족하고 안정적인 재정 지원 시스템도 미비하다.

‘현대의 복음선교’ 14항에서는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를 위해서이다’고 밝힌다. 선교는 한국교회의 시각을 넓어지게 하는 동시에 우리의 모습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동력이다. 새로운 복음화의 기운 속에 보다 성숙되고 활력 있는 교회, 나누는 교회로의 성장을 위해서도 ‘선교’에 대한 관심은 더욱 새로워 져야 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비롯 전 세계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을 기억한다.

이주연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