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요기사로 본 가톨릭신문 85년 (2)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2-03-28 수정일 2012-03-28 발행일 2012-04-01 제 2789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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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징표에 적극 응답하며 민족 복음화 위해 투신
교회 쇄신과 사회 정의 실현(1962~1981)

60년대와 70년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 있는 한국의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교회 내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한국 천주교 자치 교계제도 설정 등 굵직한 사건들로 특징 지워지는 교회 쇄신의 노력이 시작된 시기이다.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가톨릭시보는 1962년 4월 1일자 1면에 이를 보도했다. ‘대주교 삼위 임명’이란 제하에 ‘자치교구 및 교권상의 완전한 체제’ ‘3대주교구로 확립’이란 제목을 달았다. 가톨릭시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 상황을 적극적으로 보도했고, 1964년 6월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부임한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 외신을 받아 소식을 전했다. 김수환 사장 신부는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 주교에 임명돼 1966년 3월 신문사를 떠났고 1969년 3월 한국교회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됐다.

60년대 중후반에 오면서 한국사회와 교회는 경제성장을 위한 시도 와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노동·인권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JOC 활동’ ‘근로기준법 개정’ ‘산아제한’ ‘재건국민운동’ 등이 주요 이슈들이다. 가톨릭시보는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에 단호히 반대입장을 천명했으며, 이후 제기된 ‘모자보건법’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70년대 초입, 가톨릭시보의 보도내용은 당시 한국사회의 긴박감을 그대로 전해준다. 1970년 8월 30일자 가톨릭시보는 ‘한국정의평화위원회’ 창립 소식을 1면에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71년 사순절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전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거국적 정풍운동을 제의하면서 한국의 부패상을 개탄하고 사회정화에 그리스도인이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김 추기경은 ‘현시국에 부치는 메시지’에서 비상사태 선포와 보위법 변칙 통과,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의문을 제기했다. 가톨릭시보는 1972년 8월 13일자 1면 전면에 성명서 전문과 기자회견 내용을 실었다. 제작을 마친 신문은 그러나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예수 수난기’를 실었다.

1962년 3월 10일 3개 관구 11개 교구로 구성된 한국교회의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막했다.
1969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1972년 8월 15일,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남한 정부의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한국교회 입장을 담은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시대의 고난을 민족과 함께(1980년대)

80년대는 침묵과 어둠으로 시작됐다. 그 전조(前兆)인 10·26 사태부터 80년대의 또 다른 암흑과 암울은 예고되고 있었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 가톨릭시보는 6월 1일자 1면 대부분을 할애해 보도했다. 그러나 보도내용은 교회내 소식에 국한되고, 그 전말에 관한 정보는 찾을 수 없다. 이후로 광주 소식은 지면에서 사라졌다가 7월 6일자에 ‘추기경 시국담화문 발표’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된다.

암울한 시작과는 달리 80년대는 교회로선 도약의 시기였다. 1981년 10월 18일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는 80여만 명의 신자가 운집했고,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업들은 한국교회의 위상을 드러내는 기회였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최초의 한국 방문, 103위 순교 성인 시성, 나아가 1989년 10월 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세계성체대회와 교황의 두 번째 방문 등은 정의구현과 민주화운동을 통해 각인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사회의 호의적인 시선을 확고히 하기에 충분했다. 가톨릭신문은 1984년 5월 6일, 13일, 20일자 신문에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해 교황 방한에 관한 특집을 싣고 “103위 성인의 가호 속에 복음화 3세기가 개막”되었음을 알렸다.

이 와중에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노력은 식지 않았다. 1985년 김 추기경은 성탄메시지를 통해 “민주화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임을 강조하고 “정치 지도자들의 회심”을 촉구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불붙은 범국민적 저항은 마침내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가톨릭신문은 “민의수렴에 교회도 환영”이란 제목으로 7월 5일자 1면 기사에서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또 이례적으로 당시 여당 대통령 후보이던 노태우씨의 사진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의 긴급 담화 내용도 별도로 1면에 보도했다.

1984년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 참석차 처음 한국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전환기(1990년대)

90년대, 교회는 질적 성장을 요청받았다. 사회의 도덕적 보루로서 인정받았던 교회의 기득권은 그 매력을 잃어갔다. 정치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서 교회사명과 역할의 외연 또한 넓어졌다.

90년대초 한국교회의 화두는 단연 인간생명, 특히 태아생명의 존엄이었다. 낙태 조장 우려를 낳았던 ‘모자보건법’에 대해 교회는 91년말 인간생명 존중에 관한 주교단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가톨릭신문은 12월 8일자 1면 “생명경시·파괴행위 일체 단죄-정부에 낙태법 강화 촉구” 제목의 기사에서 낙태 자살 안락사 등 생명경시 행위에 대해 경고했다.

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과 92년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 유엔환경회의의 영향으로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교회 안에서도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93년 전국 환경사제 모임 결성, 94년 서울과 대구의 환경전담 사제 임명, 푸른평화운동본부 결성 등은 교회 환경운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9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 새롭게 부여된 사명으로 떠오른 것이 ‘나누는 교회’ 상(像)이었다. 1993년 한해 동안 주교회의와 가톨릭신문사가 해외원조를 위해 모금한 기금이 10억 원을 넘었다. 가톨릭신문사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공동으로 93년 9월 소말리아와 수단을 방문, 현지 상황과 영국 등 유럽 국가 카리타스들의 구호활동 상황을 생생히 취재 보도했다.

1995년 3월 1일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공식 발족되면서 한국교회의 대 북한 관련 사업은 일대 전환을 맞았다. 국수나누기 운동을 비롯해 옥수수 보내기, 긴급 지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사랑의 옷 보내기 등 다양한 북한지원 사업이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또 98년 4월, 북한 동포를 위해 교황님과 함께하는 국제 단식의 날 행사가 민화위 주최로 열렸고, 5월 15일에는 한국 천주교 고위 성직자로는 최초로 민화위 위원장 최창무 대주교 일행의 북한방문이 이뤄졌다. 2006년 11월 1일부로 국제 카리타스의 대북 사업 추진 전권(全權)이 한국 카리타스(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에 위임됨으로써 북한 지원 사업은 또 한 차례의 전환기를 맞았다.

세기의 전환,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보편교회는 1997년부터 3년간을 대희년 준비기간으로 선포했고, 한국교회도 그 지향에 따라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새날 새 삶’ 운동을 전개했다. 가톨릭신문도 ‘2천년 대희년 다 함께 준비합시다’ ‘대희년을 배웁시다’ ‘새 날 새 삶-2천년 대희년 맞이 실천방안’ ‘우리 공동체 대희년 준비 어디까지 왔나’ 등 대희년의 정신을 익히고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들을 마련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가 1992년 7월 13일 CCK 강당에서 낙태합법화에 반대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소말리아 만데라 소년들과 함께한 최기식 신부.
1998년 북한을 방문,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당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최창무 대주교. 최 대주교 왼쪽은 당시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으로 재임하던 이기헌 주교.

제삼천년기의 한국 사회와 교회

제삼천년기 한국교회는 보편교회의 새로운 세기를 향한 지향에 발맞추어, 새로운 복음화를 향한 사목적 전망을 모색하면서 교구 시노드들을 개최했다. 가톨릭신문은 200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개최 20주년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40주년을 기해 연중기획 ‘이 땅에 빛을-선교 200주년 사목회의 20주년’(2004년 4월~2005년 2월)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공의회 문헌들’(2005년 4월~8월)을 마련했다.

‘인간복제’와 ‘배아줄기세포연구’는 새로운 양상의 인간생명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논란은 결국 사기극으로 판명났다. 가톨릭신문은 황우석 신드롬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의 심각성을 일찍 간파하고 반생명적인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문제점과 “배아도 곧 인간생명”임을 초기부터 끊임없이 주장했다.

보편교회 안에서 한국교회의 위상이 높아져 2007년,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서임됐다. 한편 한국교회 최초의 추기경인 김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선종함으로써 한국교회에서는 물론 국가와 사회 전체에서 가장 보편적인 존경을 받아온 큰 별이 떨어졌다.

지난 수년간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교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몇 가지 중대한 사안들을 둘러싸고 교회의 공식 입장 표명, 이에 대한 교회 일각의 반발 등 논란을 불러왔다.

2012년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과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10월 개막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에 즈음해 공의회 정신의 온전한 실현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자기 쇄신의 노력과 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이러한 전망 속에서 신년호 특별좌담을 마련했다.

2012년, 한국교회는 산적한 사목적 과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격동의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세상과 사회 속에서 교회의 내적, 외적 소명을 확인하고 실천해온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신앙적 정체성을 모색하고 시대적 징표에 응답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아 왔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로 하여금 더욱 지혜로운 응답을 요청하고 있다. 순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오늘날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이뤄지는 신앙에 대한 도전에 응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어온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복음 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소명에 대한 더욱 투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 여정에서 가톨릭신문은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와 서울대교구 가정사목부·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공동 주최한 제7회 「생명의 날」행사가 2001년 5월 27일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서 마련됐다.
정진석 대주교 추기경 서임- 2006년 2월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