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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어명이오” / 박영호 기획취재부장

박영호 기획취재부장
입력일 2012-03-13 수정일 2012-03-13 발행일 2012-03-18 제 278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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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시작하면 호기심 때문에 끝을 봐야만 하는 탓에 드라마는 사실 잘 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미국 생활을 하는 수년 동안 한국 드라마를 전혀 안 보다가 최근 며칠을 새우며 전편을 통독한 것이 SBS의 ‘뿌리깊은 나무’이다. 시간 관계상 디테일한 부분은 지나치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서 속독한데 지나지 않지만 한국 드라마의 수준이 가히 한류를 불러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시작한 것이 ‘해품달’. ‘해를 품은 달’이라는, 약간 손이 오그라드는 류의 제목을 달고 있는 사극 애정 드라마라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장안의 화제작인지라 한 번 숙독은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담당 PD의 파업 참가로 종영을 두 회 앞두고 그만 결방이 되는 바람에 한 주를 황망하게 보냈다. 좋은 방송을 위한 의미 있는 파업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에 진득하게 기다리는 중이긴 하지만 좀 안달이 나긴 한다.

항상 사극을 보노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어명”(御命)이 아닐까 싶다. 신하가 말을 잘 안 들을 때, 건건이 토를 달 때, 걸핏하면 왕이 하는 말이 “이는 어명이다”라는 선언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신하나 내관이,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거스를 수 없는 권위를 인정하면서 왕의 말을 따른다. 이조차도 거부할 시에는, 즉 선포된 어명을 거부할 때에는 반역의 죄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왕은 왜 처음부터 ‘어명’이라고 하면서 명을 내리지 않을까? 왜 애당초 거스를 수 없는 권위를 처음부터 내세우지 않고 여러 번 말하게 하는 수고를 자초할까?

그것은 아마도 최고의 권위를 무소불위로 행사하기에 앞서, 자기 생각과 결정이 여러 사람의 의견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검증하려는 의도이지 않았을까? 경직되고 부패한, 그저 당파 싸움에만 정신을 팔다가 망하게 된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편견이 회의적인 시선을 받게 된 것은 이미 오래 됐다. 조정 관리들과 사대부들이 왜곡된 유교 전통에 집착해 아무 소용없는 탁상공론으로 지새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역시 인정된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사 결정의 도구였던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 있었다. 경연은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협의하던 일을 이르고, 서연은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것을 이른다. 이 두 자리는 모두 왕, 혹은 미래의 임금이 학문과 정치를 배우고 익히며, 이를 신하들과 나누는, 곧 토론과 협의를 통해 가장 좋은 결론을 도출해내는 중요한 정치 문화의 일환이었다.

어명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수용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바로 이처럼 토론을 통해 다수의 지혜를 결집하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거쳐, 공식적인 권위를 통해 선언하고 선포함으로써 구체화에 이르는 것이리라. 그래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은, 그리고 ‘해품달’에서 가상의 왕 이훤은 우선 어명을 내세우지 않고 명을 내리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명’임을 강조해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명’을 남발하는 것은 어쩌면 왕의 권위를 원활하게 행사할 만한 확신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싶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In necessariis unitas, in 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이라는 라틴어 경구는 17세기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우스 대주교의 교회론에서 처음 한 말이다. 본질적인 것에는 원칙과 일치된 의견이 요구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는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되, 그러한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동기가 깃들여 있어야 한다는 말이리라.

셋으로 나눠진 구절들 중 어느 부분에 강조점이 있느냐에 따라서 이 경구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것이되, 최소한 본질적인 것의 일치를 위해서 비본질적인 것에는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 경구가 어떤 맥락에서 애당초 사용되었는지, 라틴어 원본을 찾아볼 정성까지는 없지만, 사회든, 교회든 우리 삶의 터에서 다양한 의견들과 그들의 충돌로서의 토론을 두려워하고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그래서 아예 의견의 표명이나 토론의 자리조차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질과 비본질에 모두 일치를 강요하는 것이고, 이는 사랑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다.

박영호 기획취재부장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