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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는 진행 중… 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1) 총론 (상) 공의회 배경 및 영향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2-01-04 수정일 2012-01-04 발행일 2012-01-08 제 2778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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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로의 적응’ 모색하며 쇄신 추구
사회참여, 시노드 등 한국교회도 큰 변화
공의회 정신의 내적 심화는 여전히 ‘부족’
쇄신의 움직임

1959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교황 비오 12세의 후계자로 선출되고 불과 3개월째를 맞고 있던 교황 요한 23세는 이날 성바오로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베네딕도회 성바오로 수도원을 방문, 현장에 있던 17명의 추기경단 앞에서 공의회 소집을 선언했다.

요한 23세의 회고처럼 ‘전혀 예상치 않게 천상의 섬광처럼 눈과 마음에 감미로움을 발산하면서 보편 공의회 개최에 대한 열기가 일깨워지면서’ 발표된, 향후 교회 안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일성(一聲)이었다.

그해 5월 17일 준비위원회를 설치했던 요한 23세는 6월 29일 회칙 「베드로좌」를 통해 공의회의 세 가지 목적을 밝혔다. 그것은 ‘가톨릭 신앙의 발전’ ‘그리스도인의 생활 쇄신’ ‘교회 규율의 현대 적응화’였다.

이후 1962년 10월 11일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연설을 통해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가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수직함에 있어서, 이를 골동품처럼 다루지는 않고, ‘시대의 징표’에 유의하여 현대 세계 안에 형성된 새 생활 조건들과 양식에 부응하는 교회의 내적 쇄신을 도모하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외부 세계와 우호적 자세로 대화와 협력을 도모하는 데 역점을 두는 사목적인 공의회가 될 것”임을 공표했다.

‘시대의 징표’에 유의하며 교회 쇄신과 현대 세계로의 적응을 목표로 1962년 10월 11일 개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유럽교회 교부들이 참석했던 이전까지의 공의회와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교부들의 참석으로 보편성의 특징을 잘 드러낸 공의회였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규모면에서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였다. 다뤄진 안건의 양도 방대했을 뿐 아니라 참석 인원 규모도 엄청났다. 2908명 교부들 중 2600명 이상이 참석한 것을 비롯해 신학자와 전문가를 포함, 회의에 참석한 전체 인원은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된다.

유럽교회 교부들이 참석했던 이전까지의 공의회와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교부들의 참석으로 보편성의 특징을 잘 드러낸 공의회이기도 했다. 수도자들을 포함 50여 명의 평신도들도 방청인으로 참여, 교부들과 의장단 요청과 자문에 응했다.

개막 후 만 3년 2개월 동안 열렸던 교회 역사 안의 21번째 공의회. 1965년 12월 8일 바오로 6세 교황은 폐막 연설에서 전체 공의회 의미를 ‘형제애를 통해 현대인을 하느님께 다시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요약했다. 이 공의회를 두고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4개 헌장(전례, 교회, 계시, 사목)과 9개 교령(사회 매체, 일치운동, 동방교회, 주교, 수도생활, 사제양성, 평신도, 선교, 사제직무), 그리고 3개 선언(그리스도교 교육, 비그리스도교, 종교 자유) 등 16개 문헌을 통해 교회의 쇄신 의지를 표명했던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안팎의 열렬한 환영과 함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학자들은 이로써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교황 아래에서가 아니라 교황과 함께 교회 운영에 협력하는 주교단, 교회의 사회적 사명, 평신도의 적극적 교회 직무 참여, 교회의 비가톨릭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과의 대화·협력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새로운 쇄신과 개혁의 시대가 열렸다고 진단한다.

‘공의회 후 신학의 다원주의가 가톨릭 신앙을 혼란에 빠트림으로써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 수가 계속 감소됐고 성소를 포기하는 성직자·수도자들 수가 심각하게 증가했다’ ‘교회의 민주화 현상으로 교황과 주교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점과 함께 세계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공의회에서 드러난 보수주의 진보주의 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된 모습을 드러냈다’는 등의 비판이 없지 않았으나 진보주의자들은 이 같은 내적인 동요가 교황 요한 23세의 ‘아죠르나멘토’를 구현하는데 있어 거쳐야할 필수적인 과정임을 역설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
교황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공의회를 마무리한 교황 바오로 6세.

한국교회의 변화

한국교회 안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성과를 내외적으로 이룩했다.

라틴어 미사 및 제 성사 집전 경문과 기도서, 그리고 공문서 작성이 한글로 바뀌었으며 성경 역시 라틴어판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판 한글 번역본으로 바꿔 사용하게 됐다.

제대도 벽을 뒤로하고 회중을 향해 놓이게 됐고, 감실과 십자가를 향한 인사도 무릎을 꿇는 서양식 대신 허리를 굽히는 한국식으로 대치됐다. 교회 건축과 예술 및 문학 부문에서도 한국적 정서나 색채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등 외형상 성과가 드러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의 중심 개념인 ‘친교 교회론’이 강조되면서 평신도들이 주교회의 산하 각급 위원회를 비롯 단위 교회 제 위원회 위원들로 참여하게 됐고 제반 교회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사회정의 실현과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활동 등 외부 쇄신과 관련해서도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공의회 이전에 한국교회 구성원 대다수가 주로 교회 영역 안에서 성사생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신앙생활에 머물렀다면, 공의회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대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와 위상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 성과를 이뤘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교회 선교 200주년을 기념, 주교회의 의결을 거쳐 사상 최초로 성직·수도자·평신도가 공동으로 참여한 ‘한국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개최는 기념비적인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각 교구에서 사목과 신앙생활의 쇄신을 지향해 개최된 시노드들 역시 이러한 쇄신 노력의 공식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는 지금,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공의회 정신을 수용하고 열의를 드러냈지만 그 정신을 내적으로 체화하고 심화하는 작업에서는 더욱 노력을 가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역동적 성장세의 둔화, 입교자 감소, 냉담·행방불명자의 증가, 청소년 계층의 외면, 수도성소의 감소 현상 등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공의회가 촉구한 현대 세계의 복음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공의회는 한국교회 안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규모면에서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였다. 다뤄진 안건의 양도 방대했을 뿐 아니라 참석 인원 규모도 엄청났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