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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발자취를 찾아서 (1)

오혜민 기자
입력일 2011-04-27 수정일 2011-04-27 발행일 2011-05-01 제 2744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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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인정할 줄 아는 ‘영웅적 덕행’ 재조명
104회·129개국 순방 기록 세운 ‘행동하는 교황’
교회 일치에 앞장 … 시대 초월한 진리 고수 노력
시복 맞아 거룩했던 덕행의 발자취 되짚어 볼 것
전 세계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맞아 환호 중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 관련 페이스북(www.facebook.com/vatican.johnpaul2) 담벼락에는 매일 동영상과 글이 올라오고 있으며, 수많은 댓글이 달리는 등 많은 이들이 관심을 쏟고 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마지막까지도 우리의 행복을 빌었던 교황, 그래서 선종 후에도 뜨거운 사랑을 받은 교황. 5월 1일 시복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더듬어본다.

■ 화제의 인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5월 1일 시복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례없는 지구촌 순방의 기록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권 및 자본주의에 대한 맹점 비판, 시대를 초월하는 전통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점 등에서 ‘영웅적 덕행’이 돋보이는 삶을 살았다.
5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됐다. 그의 업적은 그가 이룬 ‘영웅적 덕행의 삶’이었다. 2009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영웅적 덕행의 삶’을 살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카롤 보이티야(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원래 이름). 그는 교황 임명 때부터 선종까지 세인들의 화제가 돼왔다.

그는 우선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이었고, 교황직을 수행한 첫 슬라브인이며,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이후 첫 번째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었다. 그의 소박한 취임식은 교황직을 더 빛나게 했으며,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는 교황으로 임명되기 전에도 38세의 폴란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의 주교(1958년, 크라코프대교구 보좌주교)였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 사목헌장을 다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1964년 그는 크라코프대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불과 3년 뒤인 1967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행동하는 교황’으로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례없는 그의 지구촌 순방은 1979년 1월 멕시코 바하마 방문부터 2004년 8월 프랑스 루르드 방문까지 104회, 129개국 순방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가운데는 두 차례의 한국 방문도 있었으며, 2000년에는 대희년을 맞아 이집트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을 성지순례하기도 했다.

‘행동하던’ 교황은 그 명성과 덕행에 따라 큰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81년 5월, 베드로광장에서 일반알현 당시 저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보편교회의 목자로서 그는 1982년 포르투갈의 파티마를 방문, 저격에서 자신을 구해준 성모에게 감사의 기도를 바쳤으며, 저격한 이를 오히려 용서하기도 했다.

■ 영웅적 덕행의 삶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삶은 영웅적 덕행의 삶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졌던 그는 1989년 당시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만나기도 했으며, 동유럽이 서유럽의 물질주의를 좇는 것을 보면서 회칙 「100주년」을 통해 자본주의의 맹점도 지적한 바 있다.

특히 그는 갈라진 형제들을 하나로 모으는 교회일치 운동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가운데 동방교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힘썼다. 1979년 이스탄불에서의 전례, 1986년 로마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의 설교, 아시시에서 가진 평화를 위한 세계기도모임, 2002년 미국 9·11 테러 후 종교인들과 또 다른 아시시 기도모임을 열었던 것은 그가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교황으로서 파격적 행보를 내딛었던 그에게 신앙은 늘 보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확실성의 교황’으로도 불리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은 르페브르 대주교를 파문했으며, 피임, 낙태, 동성애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계속 반대 입장을 취했다. 또 회칙 「진리의 광채」 등을 통해 전통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올곧은 신앙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시시각각 변하는 다양한 사회현상과 사회논리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인공수정과 무기산업, 대중매체와 인터넷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을 일깨웠다. 하지만 최빈국의 부채를 탕감해달라는 외채문제에 대한 요청과 교회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 행동 등은 보수적 입장에서 벗어나 파격과 함께 그의 생각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종교전쟁, 종교재판, 십자군 전쟁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잘못에 대해 비판적 연구를 하도록 했으며, 가톨릭 구성원들이 잘못한 지난 역사들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청했다.

■ 시복을 앞두고

포르투갈 출신으로 교황청 시성성 장관을 지낸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 추기경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위한 기적 인정 칙령에 서명한 뒤 즉시 가진 회견에서 “전세계가 기다리던 일”이었다며 “더 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은 5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을 시작으로 교황으로서 걸어간 그의 발자취와 복자로서의 그의 덕행, 한국과의 뜻 깊은 인연을 되짚어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일군 덕행의 삶은 모든 것을 초월한 거룩함의 모범이자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될 것이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