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가다 (상)

파리(프랑스)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1-04-05 수정일 2011-04-05 발행일 2011-04-10 제 274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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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순교’ 두려워 않던 숭고한 넋 깃들어
순교·전염병 무릅쓰고 4300명 선교사 아시아 파견
한국순교성인 현양비 통해 굳은 신앙적 교감 느껴
박물관에도 한국 전교활동 담은 다양한 유물 전시
프랑스 파리 중심가 ‘128 뤼드 박(Rue du Bac)’ 거리. 한 지붕 아래서 가장 많은 성인이 나왔다고 해서 농담 삼아 ‘순교 전문대학’이라 불리는 장소. 1658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소속 신부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선교회인 ‘파리외방전교회’ 본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다소 육중해 보이는 짙은 갈색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박물관 및 성당 건물이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 옆 창살문 너머로는 본부 건물 출입구가 내비쳤다.

전교회가 창설될 당시 이 지역은 파리 외곽에 속한, 일명 ‘변두리’였다고 했다. 서울의 강남지역이 70~80년대 이후 부상한 것처럼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둘러싼 일명 7구 지역은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각국 대사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 파리에서도 대표적인 중산층 동네로 꼽힌다.

정원에서 바라본 파리외방전교회본부 건물. 현재는 아시아에서 프랑스로 유학온 사제들의 신학원 기능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50여 년 역사 속에 복음을 위해 순교의 피를 뿌린 선교사들의 숭고한 넋이 깃들여진 곳. 무심히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또 번화한 건물들 중간에서 왠지 세상을 향한 무언의 예언자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다.

알려진 대로 한국교회와의 인연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면서부터다. 이런 면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역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본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2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초기 한국교회 설립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2003년 마련된 파리외방전교회 박물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 선교지 관련 유물과 선교사들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위층에 마련된 성당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의 전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회원들과 가족들의 기도 속에서 파견미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성당 입구 좌측 벽면 샤를르 쿠베르탱이 그렸다는 작품이 눈에 띈다. 피의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머나먼 동양의 나라로 떠나는 젊은 선교사들의 비장한 얼굴, 그리고 자식과 형제를 머나먼 극동의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가족들 심정이 헤아려지면서 마음이 아렸다.

파견을 앞둔 선교사들은 이 성당에서 파견미사와 파견식을 거행한 후 본부 정원의 성모상 앞에서 회원들과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보르도 항구로 가서 선교지로 떠났다 한다.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에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라는 선교사 파견 노래가 울리는 속에….

1843년 말 파리외방전교회 성가대 책임자로 4년 반 정도 일했던 19세기 프랑스 대작곡가 ‘구노’가 성가대를 맡으며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기간 동안 구노는 사제로서의 꿈을 가지며 2학기 동안 신학 강의를 들었으나 1847년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1848년에는 성가대 지휘 자리도 그만 뒀다고 알려진다. 그는 한국에서 순교한 앵베르 범 주교와 절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범 주교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소식을 접하고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해 작곡한 곡이 현재의 「가톨릭성가」 284장 ‘무궁무진세에’다. 성당 지하 1층에 마련된 박물관에는 구노가 작곡한 그 악보가 전시돼 있었다.

박물관내 성당.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은 한국 순례객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현재의 박물관은 2003년 개관됐다. 이전에는 본부 1층에 마련된 몇 개의 방들로 전시실이 구성됐으나 2000년 선교회 건물이 대대적 수리에 들어가면서 지금과 같은 박물관으로 단장돼 순례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최근 들어 매년 방문객 수가 늘고 있어 지난 한 해 동안만 8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동양 각지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유품들과 한국을 비롯, 각 선교지와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물을 포함해 1838년 베트남에서 순교한 피에르 보리 신부가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목에 차고 있던 칼, 선교사들이 차고 있던 족쇄, 피 묻은 헝겊, 망나니가 쓰던 칼 등이 눈길을 모은다.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입고 다니던 옷들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전교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보리 신부가 죽음 직전까지 쓰고 있었다던 칼은 이 박물관의 유래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어찌어찌 이 칼이 보리 신부가 순교한 다음 외방전교회 본부에 오게 됐는데 그 후 선교사 파견을 앞둔 후배 신부들은 본부를 떠나기에 앞서 칼 앞에서 묵상 하는 것이 관습처럼 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전교회 창립 350주년 기념식을 가졌던 파리외방전교회는 그간 4300여 명의 선교사를 아시아 각국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 그중 10명의 선교사가 1984년 시성됐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보낸 수명은 평균 3년이 넘지 못했다고 한다. 순교로 인한 죽음도 있었지만 전염병, 기아, 강도 피습 등의 이유로 선교사로서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현재는 250여 명의 선교사들이 아시아 12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본부에는 15명의 회원과 함께 60명 정도의 아시아 교회 유학생 신부들이 생활하고 있다. 일종의 신학원인데, 과거에 비해 지원자가 줄면서 회원 수 역시 줄어들게 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교회 유학 사제들을 돕는 모습으로 전교회 활동 몫을 넓힌 것이라 볼 수 있다. 본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학생들을 포함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프랑스 내에서 돌보고 있는 전체 유학생 수는 100명 정도라고 한다. 아시아인 사제 양성에 힘썼던 그간의 전교회 고유 몫을 또 다른 모습으로 아시아교회와 나누고 있는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는 동양적 이미지가 물씬 풍겨 나오는 팔각정이 있다. 이 팔각정 앞에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동료 선교사들의 순교가 알려지면 함께 모여 감사의 송가인 ‘테 데움(Te Deum)’을 불렀다고 한다. 1831년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후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이뤄질 때까지, 그 사이 조선에 밀입국한 선교사는 30여 명에 달한다. 당시 본부에서 조선은 가장 위험한 나라였지만 그만큼 선망의 나라로 여겨졌었다고 했다. 2003년 서울 명동본당 신자들이 뮈텔 대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한국순교성인 현양비가 정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박해로 점철된 한국 초기교회 시절, 교우들과 함께 피를 흘리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기리며,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하신 외방전교회의 모든 사제들….’ 현양비에 적힌 글귀들이 새삼 깊숙한 의미로 다가왔다. 시공간을 뛰어 넘어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굳은 신앙적 교감을 드러내는 모습이었기에….

2003년 서울 명동본당 신자들이 뮈텔 대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한국순교성인 현양비 본부 정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파리(프랑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