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마태오 리치 선종 40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 Ⅱ 마태오 리치의 저술들 - 아시아 선교에 미친 영향

김혜경(세레나·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입력일 2010-09-28 수정일 2010-09-28 발행일 2010-10-03 제 271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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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전역에 활발하게 문서선교 펼쳐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서 활동한 27년간의 선교는 그가 직접 저술한 「중국전교사」에 모두 담겨있다. 이 책은 임종을 앞둔 발리냐노가 리치에게 명해 지난 27년간의 선교활동에 대한 기록을 남기도록 한 것이다. 리치는 자신도 죽음을 앞둔 시점이었지만 장상의 명령에 순명해 이탈리아어로 「중국전교사」를 집필했다.

리치가 집필한 「중국전교사」는 이후 타키 벤투리 신부(Pietro Tacchi Venturi S.J.)가 1911~1913년 교황청 고문서실과 예수회 고문서실의 먼지더미 속에서 찾아내 원문 그대로 모아 리치의 「중국전교사」와 「서간집」이란 두 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리치는 1608년 말경부터 1610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전교사」를 집필했다. 그가 마카오에 도착할 당시 마카오는 포르투갈 영토였다.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어를 공부한 리치는 마카오에서는 주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했고, 이후 필리핀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및 도미니코회 선교사와 함께 스페인어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리치의 「중국전교사」는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에 라틴어와 중국어 개념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의 「서간집」 역시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쓰였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쓰이던 어법을 따라 오늘날 해독이 매우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이가 델리아 신부(Pasquale M. DElia S.J.)다. 그는 타키 벤투리 신부가 모은 두 권의 책을 1942~1949년 사이에 현대 이탈리아어로 옮기고, 다른 언어들은 문장의 뉘앙스를 살리면서도 읽기 쉽게 주석을 달아 총 세 권의 책으로 재출간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리치 원전 주석서」라 할 수 있지만, 델리아 신부는 그냥 「리치 원전」(Fonti Ricciane, Storia dell’Introduzione del Cristianesimo in Cina, vol I-III, Roma-La Libreria dello Stato-1942-XX)으로 소개했다. 아마도 타키 벤투리 신부가 집대성한 두 권을 「마태오 리치의 역사적 업적」(Opere Storiche del P. Matteo Ricci, S.I., vol. I-II, Macerata: Comitato per le Onoranze Nazionali, 1911)으로 소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태오 리치의 역사적 업적」은 「중국전교사」「서간집」으로 나눠진다. 「서간집」은 말 그대로 리치가 동료, 장상,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중국전교사」는 중국에 관한 리치의 조사 및 연구들이 담겨있어 당시 중국의 역사, 문화, 사회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리치의 중국 경험과 중국에 대한 견해’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에 이 역사서를 쓰게 된 동기와 집필 방식, 중국에 대한 조사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에 대한 개요와 생산되는 농산품, 중국의 학예와 과학 수준, 중국 정부, 중국의 예절과 예식, 중국인의 외모와 복식 및 관습, 중국의 미신과 이단 등을 소개한다. 2부부터는 기간별로 구분하고 자세한 소제목을 달아 마치 일기를 쓰듯 꼼꼼하게 행적들을 기록했다.

전체 13장에 걸쳐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시작하게 된 배경부터 상추안 선교센터에서의 어려웠던 상황들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3부는 1589년부터 1597년까지, 4부는 1598년부터 1603년까지, 5부는 1604년부터 1611년까지의 선교일지가 담겼다. 특히 5부 마지막 두 장은 괄호로 따로 명기돼 있고 제목이 ‘베이징에서 거룩하게 숨을 거둔 리치’, ‘베이징에 묻히는 리치’로 적힌 것으로 볼 때, 리치의 사후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델리아 신부가 주석을 달아 3권으로 발간한 「리치 원전」은 부제가 말하고 있듯 ‘마태오 리치의 중국 진출기’다. 1권은 1582년부터 1597년까지, 2권은 1597년에서 1611년까지, 3권은 부록과 목차로 구성됐다. 앞의 타키 벤투리 신부의 자료보다 해설이 많아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마태오 리치는 중국어에 관한 연구 기록도 많이 남겼다. 리치에 따르면 당시 중국어는 지역에 따른 방언이 많았고, 표준어라고 할 수 있는 ‘만다린어’는 중국의 관료들이 쓰는 관어(官語)였다. 또 구어(口語)인 관어와 문어(文語)인 자(字)는 달랐으며, 특히 자(字)는 중국은 물론 인접국들도 사용하고 있어 민족 간 혹은 인접국가 간에 구어 소통은 되지 않아도 자를 통해 문어 소통은 가능했다. 리치는 당시 문어 소통이 되는 국가들로 중국, 일본, 한국, 안남 등을 꼽았다. 아울러 중국에서는 구어를 ‘만다린어’라 불렀고, 일본에서는 ‘가타가나’(katakana)라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을 통해 마태오 리치가 얼마나 꼼꼼한 연구자였고, 훌륭한 선교사였으며, 탁월한 인류학자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의 각종 천주교 관련 번역 및 저술들은 동아시아 일대를 겨냥한 문서선교의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라는 점과 「사서」와 같은 책을 라틴어로 번역해 서방에 소개한 것을 볼 때, 중국문화에 대한 그의 존중과 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과 한국까지 문자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가 「천주실의」, 「교우론」 등과 같은 책을 집필했다는 추측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는 문자를 숭상해 글 읽기를 즐기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동아시아인들의 특성을 간파한 탁월한 선교사다운 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토착 민족들의 귀중한 문화적인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르네상스의 후예다운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리치와 이후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원들이 일으킨 문서선교는 리치가 예견하고 바랐던 대로 자(字)의 위력을 타고 조선에까지 미쳐 한국교회 탄생의 초석이 됐다.

「여지산해전도」

리치의 영향을 받아 서광계가 쓴 「농정전서」

「중국전교사」
리치와 루지에리가 마카오에서 공부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집필한 최초의 「유럽-중국어 사전」

「천주실의」

「기하원본」
「교우론」의 본문

김혜경(세레나·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