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교회 ‘이슈 83’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10-03-31 수정일 2010-03-31 발행일 2010-04-04 제 2691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신앙인들의 땀과 열정으로 뜨거웠던 한국교회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이들에 복음의 씨앗 심자
쉽지 않은 83년이었다. 때론 넘어지고, 때론 주저앉아 울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신앙인들의 따뜻한 손길에 의지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가톨릭신문은 지난 83년 동안 한국교회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옆에서 걸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보았고, 또 기억했다. 창간 83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역사적인 큰 걸음들 83가지를 정리한다.

■ 1920~1950년대

(1)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 전신) 창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 회보’가 1927년 4월 1일 대구교구 청년연합회에 의해 창간됐다. 그 후 1953년 ‘가톨릭신보’로, 54년 ‘가톨릭시보’, 80년 ‘가톨릭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선교 100주년

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 축하식 및 경축행사가 1931년 9월 26일 순교복자 축일에 경성(서울)을 비롯 평양?대구·일본동경·간도용성 등 국내의 각지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선교 100주년-1931년 9월 26일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3) 대한천주교 총연맹 결성

가톨릭의 보편적 정신을 대사회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대한천주교 총연맹 단체가 49년 8월 26일 서울에서 당시 노기남 주교 총재 체제로 출범했다.

(4) 교황 요한 23세

1958년 10월 28일 제261대 교황으로 당시 베니스 총 대주교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추기경이 선출했다. 새 교황은 자신의 칭호를 ‘요한 23세’로 택했다.

■ 1960년대

(5) 교계제도 설정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3월 10일자로 한국교회에 완전한 자치교계제도를 설정한다고 발표했다. 교황은 서울 대구 광주대목구를 대교구(관구)로 승격하고 노기남·서정길·헨리 현주교를 각각 교구의 대주교에 임명했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10월 11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개막됐다. 공의회는 1965년까지 4차 회기를 통해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검토, 다양한 쇄신 방안을 토의하고 새로운 비전을 천명했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막했다.

(7) 교황 바오로 6세

1963년 6월 21일 80명의 교황선거 추기경회의는 고(故) 요한 23세 교황의 후계자로 밀라노 대주교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을 제262대 교황에 선출했다. 이로써 ‘바오로 6세’ 교황이 탄생했다.

(8) 우리말 경문 사용

교황청은 한국 주교회의가 1964년 4월 21일 제정한 새로운 전례개혁율령을 동년 7월 11일자로 인준했다. 이로써 미사봉헌·성사집행에 우리말 경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는 모든 전례가 라틴어로 이뤄졌다.

(9) 선목 소신학교 개교

한국교회 2번째의 소신학교인 선목(善牧) 중고등학교가 ‘시대가 요구하는 사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제’양성을 교훈으로 1966년 4월 13일 문을 열었다.

(10) 소재(小齋) 대폭 완화

한국주교회의 의장(당시 한국주교단 단장) 노기남 대주교는 1966년 10월 12일 성청으로부터의 ‘소재면제승인통지’를 접수, 전국에 공포했다. 이로써 한국교회에서도 사순기간내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금요일에 육식을 할 수 있게 됐다.

(11) 교황청기구 대개편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 8월 18일 ‘성청에 관하여’라는 교황령을 통해 교황청을 일대혁신한다고 발표했다. 교황령에 의하면 성청의 종신직제를 개혁, 모든 공직의 임기를 5년으로 했다. 또 12개 성성(聖省)을 9개로 개편했으며, ‘포교성성’을 ‘인류복음화성성’으로 바꾸는 등 명칭도 개칭했다.

(12) 세계주교 대의원회의

1967년 9월 29일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제1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개막됐다. 한달 동안 진행된 회의는 교회법, 신학교, 전례 교리, 혼종혼문제 등 주요의제를 토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13) 강화 사건

한국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강화본당 및 JOC와 강화지역 직물업자협회간의 일련의 분규사태가 가톨릭사회정책에 입각해서 해결되길 희망하면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주교단은 성명서를 통해 인간의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돼야 하며 기업주들의 부당한 억압이나 해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14) 전국평협 창립

평신도사도직 전국협의회가 1968년 7월 23일 대전에서 출범했다. 이는 공의회가 제시한‘하느님 백성’ 교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15) 획기적 전례개혁

주교회의 전례위원회는 1968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왜관 피정의 집에서 제13차 회의를 개최, 주일미사 참여의무의 토요일 대치, 성체분배권 문제, 합동고백과 사죄, 장례의식의 토착화 등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전례의 토착화’문제를 일차적으로 가결시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6) 병인순교자 24위 시복

한국 순교자 24위가 1968년 10월 6일 오전 10시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복자위에 올랐다. 한국교회는 이로써 1925년에 이미 시복된 79위 복자와 함께 모두 103위의 복자를 모시게 됐다.

(17) 한국 최초 추기경 탄생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3월 28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47세)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17) 한국 최초 추기경 탄생- 1969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 1970년대

(18) 최초의 평신도 성체분배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는 1970년 8월 4일자 인류복음화성성교서 제4504-70호에 의거, 평신도에게 성체분배를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을 받고, 이듬해 2월 11일자로 인천교구내 모든 사제들에게 질병 사목상 또는 영성체자가 많을 때 등에 한하여 미사 중 적당한 사람에게 성체분배를 도우도록 했다.

(19) 김수환 추기경 시국성명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1972년 8월 9일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관한 교회입장을 밝히는 ‘현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20) 지학순 주교 징역15년

소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1974년 8월 12일 내란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위반 피의사건 선고공판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로부터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 받았다.

(21) 신자 100만명 돌파

1974년 12월 31일 현재 한국가톨릭 총신자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당시 한국 전체 인구 대비 복음화율은 3.1%였다.

(22) 신구약 공동번역본 출간

공동번역 구약성경이 1977년 부활주일을 기해 발간됐다. 1969년 번역작업에 들어가 1971년 부활에 출간된 신약에 이어 구약도 나옴으로써 공동번역 작업이 완결됐다.

(23)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제263대 교황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1세가 1978년 9월 3일 등극했다.

(24) 조선전도 발견

김대건 신부가 직접 그린 사목지도 원본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음이 1978년 충무공 연구가 이종학 씨에 의해 밝혀졌다. 김 신부의 사목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5년 이상 먼저 제작된 지도로 알려져 교계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2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제264대 교황에 폴란드 출신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이 1978년 10월 16일 선출됐다. 당시 나이 58세였다. 교회가 비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맞은 것은 1523년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이후 455년만에 처음이었다.

(26)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 사건)

YH사건과 함께 전국적인 투쟁을 불러일으켜 유신독재의 종말을 가져온 도화선이 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사건’(오원춘 사건)이 1979년 일어났다. 영양 청기면에서 불량 감자종자 피해보상운동을 주도한 오원춘(알퐁소) 씨를 기관원이 1979년 5월5일 울릉도로 15일간 납치, 폭행한 것을 둘러싸고 가톨릭교회와 유신정권이 충돌한 사건이다.

■ 1980년대

(27) 서울 소신학교 폐교

서울 소신학교가 1981년도부터 입학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지원자수 감소 등의 이유로 더이상 존속이 어렵다는 결론에 따라 취해진 조치였다.

(28) 마더 데레사 수녀 방한

1981년 5월 3일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으로 ‘빈자들의 어머니’인 마더 데레사가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29) 150주년 신앙대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신앙대회가 1981년 10월 18일 80만 신자가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29) 150주년 신앙대회-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렸다.

(30)외방선교회 사제 첫 파견

한국외방선교회(총재 김남수 주교) 선교사제 첫 파견 미사가 1981년 11월 8일 정오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됐다.

(31) 선목신학대 개교

1982년 3월 8일 선목신학대학이 개교했다. 1945년 성유스띠노신학교가 서울대신학교와 합병, 수업이 중단된지 37년 만에 다시 문을 연 것이다.

(32) 부산 미문화원 사건

1982년 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해 수배중인 문부식?김현장 씨를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최기식 신부가 대법원에서 징역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33) 인권주일 제정

1982년도 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10월 12~14일)는 매년 대림절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제정, 인권운동을 교회적 차원에서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34) 가톨릭대상 제정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가톨릭대상을 제정, 83년 1월 17일 수상자를 선정, 시상했다.

(35) 새 교회법 발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1월 25일 새 교회법을 공포했다.

(36) 교황 방한

1984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순교의 터전에 입맞춘 교황은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을 주례했으며, 새 사제 38명에 대한 서품식도 함께 거행했다.

(36) 교황 방한- 1984년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 참석차 처음 한국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7) 노기남 대주교 선종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며 제10대 서울교구장을 역임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1984년 6월 25일 명동 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당시 향년 83세였다.

(38) 해방신학 훈령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해방신학의 일부측면에 대한 교시’를 발표, 1984년 9월 3일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무비판적으로 빌려온 개념들을 사용하는 해방신학의 어떤 부류들은 가톨릭 교의와 합치될 수 없다고 밝혔다.

(39) 200주년 사목회의

200주년 기념 사목위원회는 1984년 11월 30일과 12월 1일 양일간 사목회의를 통해 4년여에 걸쳐 추진되어 왔던 12개의 사목회의 의안을 확정, 복음화 3세기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좌표를 설정했다.

(40) 첫 남미 선교사제 파견

전주교구는 84년 12월 28일 교구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남미에 선교사제 3명을 파견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파견된 사제는 정승현 신부, 김윤섭 신부, 방의성 신부 등이다.

(41) 한국성인축일 의무축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5년 3월 12일 ‘한국103위 순교성인들의 축일’을 세계공용 로마축일표에 ‘의무적 기념’으로 수록할 것을 성사경신성 교령으로 선포했다. 또 이는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에 삽입됐다.

(42) 40년 만에 북한서 미사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분단 40년만인 1985년 9월 22일 오전 7시 20분경 북한땅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은 한국순교성인 대축일이었다.

(43) 모든 주일에 교중미사

주교회의 추계총회는 1986년 1월 1일부터 모든 주일과 한국의무축일에 교중미사(백성을 위한 미사)를 봉헌키로 결정했다.

(44) 신자수 200만 돌파

한국 가톨릭신자 총수가 1985년 말 현재, 200만 명을 돌파했다. 당시 한국인구 대비 복음화율은 4.88%였다.

(45) 세계성체대회- 1989년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서울에서 개최됐다.

(45) 세계성체대회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1989년에 서울에서 개최됐다.

■ 1990년대

(46) 북경 북당서 첫 공식미사

한국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이 세례를 받은 북경 북당에서 한국천주교회 첫 공식미사가 1990년 7월 1일 봉헌됐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지 206년만에 한국교회가 봉헌한 첫 미사였다.

(47) 평화방송(PBC)개국

가톨릭 평화방송이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1990년 4월 15일 첫 정규방송을 시작했다.

(48) 우리밀 살리기 운동 본격 추진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가 1991년 11월 28일 창립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49) 낙태허용 형법개정안 폐지청원서 제출

주교회의는 1992년 태아생명수호를 위해 ‘형법개정안 제135조 폐지 낙태반대 100만 서명운동’을 전개, 낙태가 명백한 살인 행위임을 일깨웠다.

(50) 사목지침서 개정

주교회의는 1992년 3월 24~26일 춘계주교총회를 통해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최종안을 확정했다. 1931년 조선교구설정 1백주년을 맞아 ‘공용지도서’를 제정한 이래 61년만에 개정되는 것이었다.

(51) 가톨릭교회 새 교리서 공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입각한 가톨릭교회 새 교리서가 1992년 11월 16일 공표됐다. 트리엔트 공의회 후 로마 교리서가 간행된 이래 426년만의 일이었다.

(52) 인간배자 실험성공, 교회 반발

미 조지 위싱턴 대학의 인간 수정란 증식복제 실험 성공 내용이 1993년 10월24일 보도됨에 따라 전 세계가 경악했다. 교황청은 “가정 파괴와 인류 자멸을 초래하는 반인류, 비인간적 행위”라고 규탄하고 이 같은 실험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53) 성직자 갑근세 납부 전국 확대

1994년 주교회의 춘계총회에서 성직자 소득세 납부가 결정됐다. 수원교구가 6월 10일 교회 사상 처음으로 교구 소속 성직자들에 대한 소득세를 납부한데 이어 성직자 납세가 범교구 차원으로 확대됐다.

(54)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본부 발족

위기에 처한 농업과 농촌을 살리기 위한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천주교 본부’가 1994년 6월 29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창립됐다.

(55)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1995년 6월 6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한국통신 노조원에 대한 경찰의 긴급 구속과정에서 공권력이 사상 최초로 명동성당에 난입, 성전을 유린했다.

(56) 한일 주교단 공동 역사교재 편찬추진

이문희 대주교와 하마오 후미오 주교를 대표로 한 한일 양국 주교단이 1996년 2월16일 일본 동경 가톨릭회관에서 ‘한일 교과서 문제 1차 간담회’를 갖고 공통 역사 교재 편찬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57) 새 미사통상문 인준 시행

우리말 새 미사 통상문이 1996년 4월19일자로 교황청 경신성사성으로부터 인준과 사용허락 승인을 받고, 대림 첫 주일인 12월1일부터 전국에서 시행됐다. 1967년 10월17일부터 사용해 온 우리말 미사 경본을 30년만에 개정한 것이다.

(58)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우리말본 완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1996년 5월17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우리말본을 완간했다.

(59) 식량난으로 고통받는 북녘 형제와의 나눔 활발

1997년은 북한의 형제들을 위한 나눔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한 해다. 서울대교구 국수 나누기 운동 등이 춘천교구 ‘한솥밥 한식구운동’ 등으로 확산됐다.

(60) 마더 데레사 수녀 선종

금세기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던 인도의 데레사 수녀가 1997년 9월 6일 오전 캘커타에서 8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61) 대희년 주교특위 ‘새날 새삶’ 운동 전개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는 1998년 2월 26일 대희년 정신의 생활화운동인 ‘새날 새삶’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하고 전국적인 운동에 돌입했다.

(62) 정진석 대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착좌

정진석 대주교가 1998년 6월 29일 제13대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다.

(63)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한국교회의 맏배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축성 100주년을 맞아 1998년 5월 29일 김수환 추기경과 주교단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기념 대미사가 봉헌됐다.

(64) 한국평협 묵주기도 1억단 봉헌

한국평협은 1999년 대희년 맞이 준비의 일환으로 묵주기도 1억단 봉헌운동을 펼쳤다. 경제위기 극복과 북한동포 돕기, 도덕성 회복과 회개와 화해를 모토로 6월 1일부터 12월 24일까지 전개된 묵주기도 운동에 전국의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했다.

■ 2000년대

(65) 은총의 대희년 개막

한국교회의 새천년을 여는 은총의 대희년 개막예식이 1999년 12월 25일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전국 각 교구별로 일제히 거행됐다.

(66) 한국교회 과거사 반성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2월 3일 대림 제1주일을 맞아 한국교회의 과거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공식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하고 한국교회가 지난 역사에서 잘못된 점들을 공식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다.

(67) 신자수 400만 돌파

2000년 12월 31일 현재 천주교 신자수가 40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총인구 대비 신자비율은 8.8%였다.

(68)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속됐다.

(69) 똑바로운동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2001년 90년대 신뢰회복운동인 ‘내탓이오’운동의 맥을 잇는 도덕성 회복을 위한 ‘똑바로’운동을 전개했다.

(70) 새 상장예식서 승인

한국교회 고유의 상장예식서가 2002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주교회의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71) 한국인 교황대사 탄생

2002년 10월 19일자로 장인남 몬시뇰이 대주교가 되면서 한국교회 출신 첫 교황대사로 임명됐다.

(72) 신(흥)영성운동에 본격 대응과 영성회복운동 확산

2004년 신(흥)영성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국내 기수련운동의 위험성에 대해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대응이 시작됐다. 이후 2005년에는 영성회복운동 확산 붐이 일었다.

(73) 한국천주교 완역 ‘성경’ 탄생

2005년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된지 처음으로 한국교회가 독자적으로 완역한 새 ‘성경’이 탄생했다.

(7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및 베네딕토 16세 교황 탄생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5년 4월 2일 8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이어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제265대 교황으로 4월 19일 선출됐다.

(75) 정진석 대주교 추기경 서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6년 2월 22일 서울대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75) 정진석 대주교 추기경 서임- 2006년 2월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76) 가톨릭대사전 12권 완간

‘한국가톨릭대사전’이 2006년 13년간의 편찬 여정을 마치고 완간됐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새 교회법에 토대를 둔 독자적인 가톨릭대사전을 보유하게 됐다.

(76) 가톨릭대사전 12권 완간- 2006년 6월 12권 발행으로, 13년 동안의 편찬 여정을 마무리했다.

(77) 아시아 첫 청각장애 박민서 신부 수품

2007년 7월 6일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에서 청각장애인 박민서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아시아 교회 최초의 청각장애인 사제 탄생이었다.

(77) 아시아 첫 청각장애 박민서 신부 수품- 2007년 7월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에서.

(78) 가톨릭신문 80주년 특집호 교황에 봉정

가톨릭신문은 2007년 9월 5일 창간 80주년 특집호를 바티칸 성 베드로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봉정했다. 가톨릭 언론이 80주년을 맞는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다.

(79) 아시아 첫 생명윤리 전문 대학원 설립

가톨릭대학교는 2007년 9월 20일 ‘생명대학원’의 정식 설립인가를 받고 신입생 모집에 나섰다.

(80) 한국교회 통합 양업시스템 개통

한국교회 종합정보화 시스템 ‘통합 양업시스템’이 2008년 9월 24일 개통됐다.

(81) 신자수 500만 명 돌파

2008년 말 현재 신자수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 인구 대비 복음화율은 9.9%다.

(82) 김수환 추기경 선종

한국교회 최초의 추기경이자 교회를 넘어서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김수환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선종했다.

(82)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09년 2월 16일 많은 이들의 추모 속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83) 한국교회 5000번째 사제 탄생

2009년 6월 26일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에서 제기동본당 손호빈(디오니시오) 신부가 한국교회 역사상 5000번째 사제로 탄생했다. 한국교회에서 5000번째 사제를 돌파한 것은 첫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 이후 164년 만의 일이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