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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⑤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07-22 수정일 2009-07-22 발행일 2009-07-26 제 2658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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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자들은 그를 통해 큰 은혜 받았다
비안네 신부는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고, 강론을 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으며, 온힘을 다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할 것을 가르쳤다. 비안네 신부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지방의 온화한 기후가 나를 괴롭힙니다. 나는 일도 너무 적게 하고 편하게 지내니 지옥에 떨어질까 항상 걱정됩니다.” 그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부자였던 한 귀족 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겸손한 사제는 진주같이 귀한 사람이다. 이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열심한 신자들만 비안네 신부에게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쉬는 신자들이 문제였다. 아르스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심이 깊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조차 모르는 쉬는 신자가 허다했다. 마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축제가 열렸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퇴폐적인 춤과 술에 빠져 살았다.

비안네 신부는 이 같은 풍습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얼마나 마을 사람들에게 강도 높게 하느님 사랑을 선포했는지는 다음의 미사 강론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님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조금 후 우리 주님(성체)을 들어 올릴 때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들의 눈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은총을 누구에게 선물할지 찾고 계시지만 아무도 그 은혜를 구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안네 신부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내며 열성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 강론 및 교리 강좌 준비도 하였다.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고, 몇 년 후 아르스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가 되었다.

비안네 신부는 병자를 방문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꼭 방문했다. 한 번은 자신의 몸이 몹시 아픈데도 병자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병자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해 성사를 집전한 것이다.

성사에 대한 비안네 신부의 이러한 열정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823년이다. 비안네 신부가 36세 되던 그 해,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 피정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고해성사를 줄 사제가 부족했다. 결국 비안네 신부에게도 고해성사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한겨울에 9km를 왕복하며 이뤄진 고해성사는 고행성사였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이때 고해자들은 비안네 신부를 통해 죄사함의 큰 은혜를 느꼈고, 그 고해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몇 주일 동안 계속된 피정에서 비안네 신부의 고해소는 늘 신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밀려드는 신자들로 인해 고해소가 넘어져 부서질 정도였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한 번은 한 신자가 비안네 신부를 쉬게 하기 위해 고해소로 갔지만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정에 찾아가도, 새벽 2시에 다시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이 신자는 완력으로 신자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고해소 문을 열고 신부를 모시고 나올 수 있었다.

이후 비안네 신부는 선종할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했다. 본당 신부들도 서로 비안네 신부를 모시겠다고 말다툼을 벌였을 정도였다. 아르스 마을 기록에 따르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명에 달했다. 비안네 신부가 고해소를 나갈 때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해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비안네 신부의 수단자락을 끌어당기고, 어떤 이들은 또 옷을 찢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고해성사에 임했다.

여기서 50대 비안네 신부의 하루 일과를 보자. 그는 대체로 자정과 새벽 1시경에 고해소로 갔다. 그리고 새벽 6시 혹은 7시에 고해소에서 나와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고해소에 들어간 비안네 신부는 오전 10시쯤 다시 나와 성무일도 기도를 바쳤다. 11시에 교리를 가르치고 성당에서 나와 사제관에 가서 각지에서 온 편지를 읽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고해소로 향했다. 다시 고해소에서 나오는 시간은 저녁 7시 혹은 8시. 이후 비안네 신부는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고, 강론대로 올라가 강론을 한다. 강론을 마친 후 약 9시 경, 비안네 신부는 비로소 혼자가 된다. 이 시간을 이용해 그는 아침기도를 외우고, 영적 독서를 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그는 선종할 때까지 하루 평균 2~3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농부의 아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 났지만 이러한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되어 점점 쇠약해졌다.

73세가 되던 1856년 6월, 비안네는 성체를 모시고 갈 힘도 없었지만 평소대로 고해소에서 16시간을 보냈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를 바쳤다. 사제관으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쓰러지며 말했다.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2개월 후인 8월 2일, 비안네 신부는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마을은 울음과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며, 사제관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 부었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41년 5개월 동안 작은 시골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가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하늘로 오르던 날, 아르스 마을 사람 모두가 울었다.

# 비안네 신부는 이후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1928년 4월 23일 비오 11세가 시성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또 비안네 성인을 1929년에 ‘본당 신부의 수호자’ 로 선언했다.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태어난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