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의 해 기획-사제의 사제]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①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9-06-23 수정일 2009-06-23 발행일 2009-06-28 제 265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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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열여덟에 스승 '발레 신부'를 만나다 
1786년 프랑스 농촌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신심 뛰어났지만 학업에서는 ‘열등생’으로 평가
성 요햔 마리아 비안네
비안네 신부가 본당 신부로 머물렀던 아르스 성당.
◆기획을 시작하며

교황청은 사제의 해 선포 취지와 관련, 사제들이 스스로의 직분에 대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하느님 백성 전체가 사제직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사제의 해 행사는 외적인 화려한 행사가 아니라 내적 쇄신을 통하여 사제직의 고유한 신원과 사제단의 형제애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특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사제의 해와 관련, “사제들의 선교 의식 회복이 절실하다”며 “사제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복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들을 만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가톨릭신문의 사제의 해 기획은 이러한 보편교회의 요청과 한국 교회의 필요에 대한 응답으로 마련됐다.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앞서서 살아간 사제들의 사표는 사제들에게 인간적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세상의 달콤한 사상, 무비판적 감성, 따뜻함이 없는 이성, 편향된 논리, 필요를 가장한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통로로 내놓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번 사제의 해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 기념에서 출발하는 만큼 우선 비안네 성인의 삶과 영성을 다룰 예정이다. 이후 필립보네리, 돈보스코를 비롯해 까르딘 추기경으로 이어질 사제 열전은 고 최민순, 선종완, 이문근, 길홍균, 배문환 신부 등 한국 교회 선배 사제들의 삶도 함께 다루게 된다.

‘사제의 사제’ 기획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디딤돌 놓기다.

사제직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앞으로 1년간 사제직의 모든 것을 현장감 있는 취재와 연구로 접근하는 기획이다. 사제직의 정체성과 역사, 소명의 신학적 의미와 역사적 해석들 등 사제직의 이론적 차원을 사제직 현장과 연결해 다룰 계획이다.

이 기획에서는 권위의 기원과 역사, 성품성사의 모든 것, 교부들의 사제영성, 현대 사제의 영성, 심리학으로 바라본 사목자의 심리, 교구 사제와 남녀 평신도의 관계, 사제단의 친교 등 매주 1개씩 주제를 선정해 사제직을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예정이다. 개신교 교역자 양성과정, 한국 불교의 승려교육, 유교의 지도자 양성 등도 주요 주제들이다. 또 본당 사제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군종사제, 특수사목 사제들의 삶에도 귀 기울이기로 했다. 사제 양성에 대한 다양한 제언과 사제를 향한 가족들의 기도도 함께 다룰 계획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을 맞아, 6월 19일 예수성심대축일부터 내년 6월 19일까지 1년을 ‘사제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사제직의 고유한 신원과 사제단의 형제애를 재발견하고, 복음선포에 대한 사명을 재인식하는 이 소중한 시간을 가톨릭신문이 함께합니다. 앞으로 1년간 사제들의 사표들을 소개하고, 현장 중심의 사례를 바탕으로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논거들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사제직의 모든 것을 탐색해 나갈 이번 기획에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랍니다.

“제가 만약 사제가 된다면 많은 영혼을 구하겠어요.”

눈이 움푹 들어간, 하지만 맑게 빛나는 파란 눈을 가진 열일곱 살 소년의 꿈은 오직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요한 마리아)는 사제가 되겠다는 아들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용 인근의 한 농촌 마을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아들, 요한 마리아 비안네(John Mary Vianney)는 자라는 동안 여느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심만큼은 남달랐다. 비안네가 일곱 살 때 성모상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비안네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3살 되던 해(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파리에선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었으며, 살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려면 몸을 숨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비안네가 13살이 되고 나서야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첫영성체도 물론 창문을 가린 방에서 해야 했다. 이런 생활은 1799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후 1801년 정교 협약을 거치고 나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성소의 꿈을 이야기한 그 이듬해, 열여덟 살의 비안네는 인근 본당 발레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늘 위대한 스승이 있듯, 비안네에게는 발레 신부가 있었다.

하지만 초창기의 비안네는 발레 신부를 당황하게 했다. 어린 시절, 농사일만 배운 비안네는 기초 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했다. 자국어였던 프랑스어의 문법조차 제대로 몰랐으니, 당시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필수였던 라틴어는 더욱 몰랐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마티아라는 학생이 비안네의 라틴어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마티아는 속에서 불이 났다. 다른 친구들은 조금만 도와주면 번역할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을 비안네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멍청이~.” 결국 마티아는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비안네의 뺨을 때렸다. 마티아는 비안네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다. 비안네의 몸은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로 다져온 건장한 몸이다. 힘도 당연히 더 셌다. 그런데 비안네는 여덟 살 어린 소년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마티아와 비안네는 이후 평생 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발레 신부는 뛰어난 성덕과 신심을 가진 비안네가 학업 때문에 성소의 꽃을 피우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런 발레 신부에게 비안네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발레 신부에게 짐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발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야. 사제품. 영혼들의 구원도 끝나는 거지.”

하지만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안네의 공부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런 비안네가 발레 신부의 곁을 떠난다. 이제는 홀로서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하지만 공부 문제는 나폴레옹 황제의 징집으로 인한 병역 문제 이후, 1812년 소신학교 철학과정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 비안네의 발목을 잡는다.

당시 신학교 시험은 교수와 학생들이 라틴어로 문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비안네는 시험 때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학 동기들은 그를 비웃었다. 사람들은 그를 ‘열등생’으로 낙인찍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절 비안네의 성모 공경 신심이 더욱 깊어진다. 어려운 학업을 극복하기 위해 비안네는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서원한 것이다. 그리고 학업의 어려움 속에서 평생의 영적 동반자, 마르첼리노를 만나게 된다. 마르첼리노 샴파냐(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교육수사회 창설자)도 역시 라틴어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현실이었다. 비안네의 고민은 깊어갔다. 공부를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당시 비안네의 학년말 생활기록부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근면 : 좋다 ▲행실 : 좋다 ▲성격 : 좋다 ▲지식 : 나쁘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1786년 출생, 1859년 선종. 본당 신부들의 수호성인. 축일은 8월 4일. 아르스의 본당 신부. ‘성체의 성인’, ‘고해소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모든 본당사제들의 귀감이다. 그는 사목업무의 활력을 매일의 미사성제와 성체 대전에서 머무는 긴 시간의 기도를 통해 얻었으며, 그 은총을 통해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신자들의 재복음화를 이뤄냈다.

우광호 기자